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137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137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보수 근본주의
중간 복음주의
진보 기독교 진영
민중신학 & 살림신학
종교 일반 & 사회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563
어제 794
최대 10,145
전체 2,267,836



    제 목 : [펌] 깨달음의 사회화 (박재순)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4-09 00:56 조회(8575)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1/84 




 
기존 민중신학자들 가운데서 한국의 민중신학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나름대로 그 그림을 잘 세워보려한 이가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박재순의 민중신학을 꼽을 것이다.
그의 기존 민중신학에 대한 문제제기와 방향은 매우 적절한 감이 있다.
 
단지 이를 체계화한 통전적 신학이 되기 위해서 기존의 서구신학과 민중신학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제반적인 문제들을 검토함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선 분명하지 못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동양사상과 친화적 관련 작업들은 긍정적 측면이 크다고 본다.
 
또한 이 분의 화이트헤드 이해에 대해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그는 백두의 파악(prehension) 개념을 매우 희한하게(적어도 내게 있어 그러한 해석은 처음 듣기에) 이해하고 있다.
물론 파악이란 뜻에는 '붙잡아 모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아래의 글에서도 나오지만 이 파악(움켜쥠)에 대해
백두 사상에도 역시 서구사상에 깔린 타자에 대한 공격적 지배와 정복의 흔적이 있지 않느냐 혹은 
백두 역시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발상을 깔고 있지 않느냐라는 비판을 하는 것이다(이 얘긴 내게 직접 했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화이트헤드가 말한 존재론적 사태를 곧바로 사회학적 지평으로서 오도한 결과다.
 
파악이란 개념에는 모든 과정적 존재들은 선행하는 여건들에 대해
선택과 배제의 활동과정을 가짐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때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도대체 선택과 배제의 활동을 하지 않는 존재론적 사태가 어디에 있는가?
그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선택과 배제의 활동을 한다.
 
저 들녘의 백합은 그 백합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여건들(빛, 바람, 물, 흙, 세균 등등)에 대해
그 나름대로 선택과 배제의 활동을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노무현 대통령을 볼 때도
그 역시 주변의 여러 여건들(여기에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여건들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정책들도 포함하는 사회학적 지평의 여건들도 함께 있음)에 대해
그 나름대로 선택과 배제의 활동을 하면서 자기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꾸려나간다.
 
우리가 믿는 예수라는 존재도 그러했다..
그 역시 좁은 문인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고 넓고 편한 문으로 가는 길을 배제했다.
 
모든 존재들은 그 어떤 선택과 배제의 활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란 것도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파악 자체를 곧바로 공격적 지배 혹은 정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이 파악이란 개념에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따로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개념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선태과 배제의 활동을 통해 관계성을 맺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과 배제의 활동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존재일 뿐~!
 
이처럼 박재순 교수의 백두 이해에는 이같은 엄밀하지 못한 지점이 있다.
아마도 서구 사상에 대한 불신이 더 깊이 깔려 있기에 이러한 오도된 독해까지 나온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대한 전반적인 색조나 경향성만큼은
기독교 신학에도 매우 유익하고 유용하다고 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의 글을 퍼온 것이다.
 
.........................................................................
 
 
 
 
깨달음의 사회화
 
박 재 순 (목사 한신대 대학원 한국신학/생명/민중신학)
 
 
 
 
깨달음은 잘못이나 어리석음을 알아채고 벗어남을 뜻하며 사회화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깨달음의 사회화는 개인적 주관적, 주체적인 깨달음을 나와 타자의 관계와 교류를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 속에서 실천하고 반영하는 것을 뜻한다.

1. 어리석음, 미망(迷妄)에서 벗어남
 
미망(迷妄), 어리석음: 1) 나와 네가 같다는 착각. 인간의 근본적 착각과 환상=모든 것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집착과 경향. 나는 네 속에 없는, 나는 네가 아닌 그래서 너를 가질 수도 없고 지배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존재이다. 2) 내가 이제 여기서 늘 살 듯한 착각 속에 산다. 덧없는 존재임을 잊고 산다. 덧없지만 서로 이어지고 서로 돕는 관계 속에 사는 존재임을 잊고 산다.

성서에서 원죄와 타락은 선악과를 먹고 창조자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좋고 나쁨,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와 기준이 된 것을 뜻한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고 자기가 중심에 서야 한다는 착각과 환상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2. 깨달음:
 
1) 나를 깨달음: 나는 왜 다른 이(존재)가 아니고 나인가? 내가 나라는 깨달음. 나는 나다! 매임 없는 자유, 스스로의 주체선언. 나를 위한 자유선언. 나를 발견하고 나를 세운다.

2) 너를 깨달음: 남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내가 나임을 깨닫는다. 나의 다름과 속성 강조. 나는 타자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간다. 남을 발견하는 일. 너 안에서만 참 나가 되고 영원할 수 있다.

3) 너와 나의 하나됨, 자유: 나와 너(타자 만물)은 하나다! 하나님 안에서 우주만물이 이어진다. 사랑으로 타자들에게 결속되어 있다. 바울은 사랑으로 빚진 자라 했고 루터는 만인으로부터 자유롭고 만인의 종이라고 했다. 사랑은 너를 위한 자유이다. 사랑은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너를 위해 존재할 수 있는 힘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 교회, 그리스도인은 너=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했다. 나의 생명의지와 너의 생명의지가 하나로 통일되어 인격과 행위로 실현된 존재가 그리스도이다.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 석가, 간디, 해월이다.

3. 서구와 동양의 인식의 차이
 
1) 타자에 대한 서양의 인식
 
서구에서는 타자에 대한 인식론이 공격적이고 지배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 형상인, 목적인, 운동인, 질료인에서 원인을 나타내는 말은 아이티아(eitia)인데 법정에서의 신문과 공격을 뜻한다.
서구의 생명이해는 생명체의 내적 자아(주체)와 정신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서구의 사고는 기본적으로 타자에 대해 닫혀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예외로 생각할 수 있는 철학자는 '너 의식'에서 '나 의식'이 생겨난다고 본 마틴 부버와 유기체적 과정철학을 제시한 화이트헤드일 것이다. 그러나 마틴 부버는 '너와 나'의 배타적 독점적 관계에 집중한다. 타자들은 '나'와의 관계 속에 들어올 때만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너')가 된다.(나와 너. 12-5쪽)
 
서구에서 관계적이고 유기체적 사고를 하는 철학자들은 마틴 부버와 화이트헤드이다. 마틴 부버가 너-나 관계 속에서 모든 실재를 보려했지만 나와의 관계 속에 들어 올 때만 인격적 관계가 성립된다. 나와 관계하지 않는 것은 그것, 사물에 머문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현실재는 과정과 사건이다. 느낌과 파악(prehension)이 핵심어이다. 과거의 현실재가 새로운 현실재의 먹이가 되고 새 현실재는 과거의 현실재들을 선택적으로 배제하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움켜쥠(prehension)으로써 생성된다. 다른 현실재들을 배제하고 선택적으로 움켜쥠으로써 현실재의 주체가 생성된다는 것은 생명과 물질이 생성과 운동, 존재의 원리와 방식이 움켜쥠과 배제임을 뜻하며, 이것은 서구의 공격적이고 정복적인 인식과 이해의 방식을 나타낸다.
 
화이트헤드는 어떤 현실재(現實在)들이 다른 현실재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비워줌으로써 유기체적이고 과정적인 합생(合生)이 일어난다고 말하지만, 합생에서 중심개념은 '움켜쥠'(prehension)이다. 현실재가 다른 현실재들을 주어진 자료로서 주체적으로 움켜쥠으로써 다시 말해 체험, 흡수, 파악 변형, 정렬시킴으로써 또는 배제, 유기, 거절,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현실재를 보다 풍요롭고 새롭게 창조해 간다고 보았다.(과정철학과 과정신학 80. 91쪽) 화이트헤드의 '움켜쥠'에는 타자에 대한 지배와 정복의 관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자아의 팽창과 실현을 추구한 서구사상에서는 타자에 대한 공경과 배려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設)에서 자아가 망각한 이데아를 타자와의 만남에서 회상하게 된다고 할 때도 타자는 자아가 잊었던 이데아를 회상하는 계기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독일 신학자 불트만이 타자(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자아의 실존이 회복된다고 본 것과 같다. 엠페도클레스가 타자에 대한 지각을 고통과 관련시키고 몰트만이 타자와의 만남에서 갖게 되는 첫 느낌을 고통으로 본 것도 타자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우호적 사고를 드러낸다.

뭇 생명은 자기 안에 존재와 활동의 중심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체는 그 나름의 주체성, 자아성을 가지고 있다. 한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에게 타자로 나타난다. 타자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우호적 사고는 정복전쟁, 권력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 정치사회문화를 형성해온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서 타자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비우호적 사고는 그들의 언어구조와 실체론적 사고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유럽언어들의 뿌리 말에 해당하는 라틴어에서는 주어가 술어를 지배하고 규정한다. 동사의 형태는 일방적으로 주어의 성 수 격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명사와 형용사도 자신의 성 수 격에 따라 그 꼴이 결정된다. 주어가 지배하고 명사와 형용사가 자신의 성 수
격에 따라 변화하는 라틴어의 문법구조와 성격은 정복자적인 사고경향과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고경향을 조장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자기완결적이고 배타적인" 실체개념이 서구철학의 중심개념이 됨으로써 타자에 대한 열린 사고와 타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사고가 발달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2) 타자에 대한 동양의 인식의 차이
 
주역에서는 숨에는 깊은 생명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빚고 하나님의 생명기운(숨)을 코에 불어넣음으로써 인간을 창조했다. 하나님의 생명기운, 하늘의 기운을 흙으로 빚은 사람의 몸 속에 넣는다는 것은 하늘(天)이 흙(地) 속에 들어온 것을 뜻한다. 주역에서 하늘이 겸손하게 땅 아래로 오면 태평해진다고 한다. 하늘이 땅 위에 높이 있으려 하면 위험하고 흉해진다. 그러나 땅이 앞에, 위에 오고 하늘이 땅 뒤에 땅 아래 오면 태평해진다는 것이다.(地天泰) 평화세계(하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天)이 사람의 몸(地)을 입고 땅 바닥으로 내려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주역의 지천태가 시사하는 생명 평화세계의 진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몸으로 하늘바람을 숨쉬는 숨에는 기독교적 인간창조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고 주역에서 말하는 지천태의 신비가 숨겨 있다.

주역에서 겸괘(謙卦)는 늘 길하고 이롭다. 강하고 높은 이가 자기를 낮추고 비울 때 생명이 융성해지고 풍성해진다. 강해진 음이 스스로 줄어들 때 생명이 생겨나고 생명활동이 이루어지며, 강해진 양이 스스로 줄어들 때 생명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를 비우고 줄임으로써 생명이 발생하고 활동한다는 주역의 사고는 '타자'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담고 있으며, 공생과 상생의 관념을 반영한다.

하늘과 땅이 하늘이 땅 아래 오는 방식으로 결합된 것을 묘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이 하늘에만 있고 땅은 땅에만 있다면 하늘과 땅은 분리되고 참다운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으로 남는다. 그러나 강하고 높은 하늘이 약하고 낮은 땅에 내려와 화합하고 일치하는 것은 하늘과 땅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 되는 묘합을 이룬 것이다.

스스로 낮추고 비움으로써 생명활동이 융성해진다고 보는 동양적 생명이해는 상생과 공생의 원리로 이어진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만물은 서로 살림(相生)과 서로 누름(相剋)의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 생명세계에서도 서로 살림과 서로 누름의 원리가 지배한다. 그러나 생명세계에서는 서로 누름보다 서로 살림의 원리가 우세하고 주도한다. 만일 서로 누름의 원리가 우세하다면 생명세계는 줄어들고 약해져서 결국 소멸할 것이다. 또 서로 누름과 서로 살림의 원리가 똑 같이 지배한다면 생명세계는 정태적인 균형과 조화 속에 지루한 반복만 있었을 것이다. 서로 살림이 우세하기 때문에 생명세계는 큰 조화와 균형 속에서도 자유롭고 다양하고 풍성하게 생성하고 발전하고 진화해 가는 것이다.

생명은 상극보다 상생의 관계다. 먹이사슬의 구조와 관계도 상생조화 속에서의 먹고 먹힘이다. 오히려 먹임으로써 사는 관계,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밥으로 줌으로 함께 사는 상생조화의 길을 연다. 호랑이는 늑대를 먹고 늑대는 양을 먹고 양은 풀을 먹는다. 그러나 호랑이도 늑대도 양도 죽어서는 풀의 거름이 된다. 먹이사슬의 순환과 상생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4. 어떻게 깨닫는가?
 
1) 바울의 깨달음
 
깨달음은 깨져서 깨어나서 닫(다름, 달림, 닫음)는 이. 깨달은 이는 깨어서 달리는 이, 깨어서 닫는 이, 다름을 깨는 이.

깨달음은 죽었다 다시 사는 일, 깨져서 깨나는 일이다.

깨지고 깨나야 나도 보고 너도 본다.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한 것은 왕창 깨진 것이다. 세계관 인생관 자아상, 종교관이 모두 깨졌다. 눈멀었다 다시 보게 되었다. 새 눈을 뜬 것이다. 새 눈은 보는 눈과 보이는 대상의 상이 하나로 된 것이다. 보는 눈, 주관과 보이는 대상 객관이 하나로 되는 순간, 나와 너가 하나로 되는 순간이 깨달음의 순간이다. 바울은 제 눈을 제가 본 것이다. 주객이 분리된 인간은 제 눈을 못 본다. 예수를 통해서 제 눈을 보았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홀로 있음, 자유로움은 물질과 욕망, 감각에서 자유롭다는 것인데 억압과 착취와 소외에서 자유로움을 뜻한다. 깨달음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이다. 참나, 다른 이와 하나인 나를 깨달음이다. 나와 다른 존재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깨지는 일이다.
 
2) 종교들의 깨달음
 
모든 종교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삶 속에서 실현하려고 한다.

샤마니즘, 무교는 원초적인 생명과 생명의지를 그대로 긍정한다. 현세적 삶의 풍성한 실현을 추구한다. 사회역사의 억압적이고 제한된 틀과 억압적 관계, 억눌린 운명적 삶에서 벗어나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신령들과 죽은 자들의 혼령들과 하나가 되어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지성의 비판과 저항이 부족하고 감정과 영감이 우세하다. 개인적이고 기복적이다. 자신과 가족의 삶에서 충만한 삶을 실현하려고 한다.

유교는 현실적이며 정치 도덕적이다. 생명의지를 사회관계 속에서 당대의 위계적 집단적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제한된 현실 속에서 원초적 삶과 생명의지를 실현하려 한다. 집단적 전통적 정서와 도덕적 의지와 현실적인 지성이 결합된다. 원초적 생명의지는 현실의 질서와 구조 속에서 제한적으로 실현되고 억압되기도 하지만 현실과 강력하게 결합된다.

도교는 자연의 원초적 생명을 긍정하고 이 생명의지에 따라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살려고 한다. 사회와 역사의 제한된 틀, 전통과 인습과 도덕의 인위적 인간관계를 넘어서 자연생명세계, 자연생명의지에 순응하고 조화시켜 살려고 한다. 생명, 생명의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옹글게 자연스럽게 실현하려고 한다.

불교는 원초적 생명의지를 정화하고 순화하려 한다. 생명의지를 부정하고 무화시킴으로써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삶에 이르려 한다. 개체의 욕망과 집착, 자아의 의지를 부정하고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한 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마음 속에서 사회의 현실 밖에서 차별 없는 삶을 이루려 한다. 카스트 철폐, 국가의 전쟁문명 부정, 개인의 욕심과 집착을 끊어버림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 완전한 세계에 이르려 한다.
 
3) 기독교의 깨달음
 
기독교는 역사의 억압과 차별 속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 생명을 실현하려 한다. 생명의지에 대한 긍정(창조와 구원)과 부정(원죄와 심판).

창조는 생명과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고 죄와 타락은 인간존재와 역사의 어두움에 대한 깨달음이다. 모든 피조물과 생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정과 사랑, 원죄와 타락, 악과 불의에 대한 준엄한 경고와 심판.

출애굽은 역사의 질곡과 사회의 억압을 깨트리고 생명의지를 실현하려는 해방 사건이다. 역사 속에서 온전한 삶,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삶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삶과 역사의 주체 선언: 나는 야훼이다. 나는 나다. 하려고 하는 대로 하는 이다. 되려고 하는 대로 되는 이다. 나는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이다. 하나님이 주체이니 인간도 주체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사적이므로 구체적이다. 한 사람에게 집중한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고 하나님 나라를 움직인다.

5. 고난의 종의 노래
 
역사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얻은 깨달음. 폭력과 차별의 진흙탕에서 핀 평화와 사랑의 꽃: 고난의 종, 평화의 노래==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다. 깨닫고 사회변혁운동에 나선다. 바울은 삶을 뒤집고 새 삶 운동을 일으켰다. 깨닫고 삶 속으로,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역사의 어두운 폭력 속에서 싹튼 평화: 고난의 종의 노래,

고난받는 사람의 삶에서 인류 구원과 평화가 온다. 고난은 사회관계, 가해자 피해자 관계에서 온다. 피해자, 희생양에게서 구원과 평화가 온다. 고난받는 사람의 삶에서 평화의 새순이 나온다. 고난받는 사람의 자기이해, 자각에서 평화가 온다. 체념이나 원한에 빠지지 않고 구원과 평화의 길을 연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고난의 종의 깨달음의 노래에서 피어난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고난의 종의 노래에 비추어 예수를 이해하고 해석한 것이다.

예수는 고난받는 이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고난은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고난이다.

지금 나의 고난은 나만의 고난이 아니고, 지금 고난 당하는 이들의 고난은 우리 모두의 고난, 나의 고난이다. 고난받는 이들의 삶에서 나와 너의 일치, 하나됨, 온 우주 생명의 하나됨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하나님 나라의 동틈을 느낀다.

큰 슬픔에서 큰 사랑이 나오고(대자대비), 큰 슬픔에서 한 몸이 된다(同體大悲). 하나님은 지금 고통받는 사람과 하나임을 느끼는 순간에 존재하고 행동하며 사건화한다.

고난받는 이가 구원자이다. 그가 고난받음으로써 내가, 우리가 산다.

십자가는 고난의 종의 길과 모습이다. 십자가에서 나의 참 모습을 보고 이웃을 볼 수 있고 모든 생명의 실상을 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습과 마음과 행동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십자가는 진리와 생명을 깨달을 수 있는 자리이다.

6. 알뜰 초월
 
세상, 역사와 사회를 부정하고 넘어서는 초월은 알뜰 초월보다 쉽다. 알뜰 초월은 세상 안에서 세상을 초월한다. 본회퍼가 말하는 세상 한 가운데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전능과 초월과 거룩을 이루는 것이다. 너를 위한 존재와 사랑이 참된 전능이고 거룩이며 초월이다. 예수는 세상 안에서 역사 안에서 세상을 초월한 이다.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세상에 매이지 않았다.

불교에서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를 말하는데 이사무애는 이론과 실천, 초월과 현실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초월과 내재의 벽이 없어진 경지이다. 초월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사사무애는 시간 속에서 세상 속에서 모든 일에 매임이 없는 경지이다. 세상 안에서 세상 일을 초월하는 자유를 누린다.

선불교에서는 말, 생각, 욕심을 끊고 할 일만 한다. 의도나 계획을 버린다. 지금 이 순간의 일을 한다. 시간과 역사 속에서 있더라도 사사무애의 경지에 이르러도 너를 위한 자유, 사회적 관계를 위한 적극적인 실천이나 구상은 없다.

본회퍼는 내가 중요하지 않고 책임적 실천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지금 내 생각, 판단, 행위가 잘못일 지도 모르나 지금의 상황, 현실에서 책임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책임지고 행동한다. 오직 믿음만으로 책임적 행동을 할 수 있다. 나의 결단과 행동에 대한 정당화는 없다. 신만이 옳다고 여길 수 있다. 미래의 역사, 사건, 사실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죄인으로서 죽는다.
 
석가: BC6세기 작은 왕국의 왕자였다.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정복자의 탐욕과 잔인함을 알리는 제도이다. 국가들 사이의 침략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석가는 고민했다. 탐욕과 거짓 위에 세운 문명의 삶은 허망하며 고통의 바다 위에 세운 신기루임을 알았다.

신분제도와 전쟁을 넘어서기 위해 고난의 바다를 뒤로 하고 마음 속으로 산 속으로 들어갔다. 욕망, 어리석음, 노여움, 본능적 생명의지를 멸하고 열반에 들었다. 생명의지를 멸한 자리는 평등하고 하나됨의 자리이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의 불이 꺼지면 카스트제도나 전쟁도 없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 사명을 깨닫고 세상 속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끌어안고 함께 구원받는 길을 열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바울, 간디, 수운, 해월은 모두 알뜰 초월의 모범이다. 바울은 세계화하는 헬레니즘 문명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기초를 놓았다. 간디는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리와 사랑의 독립운동을 했다. 간디는 굶주린 이에게는 하나님이 빵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했다.

수운 최제우는 하나님을 만나 계시의 말씀을 듣고 도를 깨달은 후 두 여종을 맏며느리와 수양딸로 삼았다. 민중의 평등과 치유와 주체를 추구했다. 해월은 뭇 생명이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하나님처럼 섬겼다.

7. 밥 한 그릇의 진리
 
밥 한 그릇에 온 우주 생명의 정기와 활동이 압축되어 있고 농부와 상인과 밥 짓는 이의 수고와 땀이 들어 있다. 유영모는 "밥값은 실제 가치의 몇 억 분의 일도 안 된다. 밥은 은혜로 먹어야 한다."고 했다. 
 
밥과 평화: 平和=고르게 밥을 먹는 것. 몸에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고르게 먹고 몸이 평화로울 수 있다. 적게 먹거나 많이 먹으면 몸에 폭행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남의 밥을 뺏으면 평화가 없다. 굶주리면 전쟁 난다. 맥거번 리포트에 따르면 식생활 습관이 잘못되어 사회범죄가 늘어났다. 평화운동은 밥을 바로 먹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밥은 먹이, 먹이는 희생양, 희생양은 구원자이다. 밥은 하늘이다. 이천식천, 자연상속은이다.

굶주린 이에게 밥이 하나님이다.(간디)

십자가: 몸의 고통을 통해서 화해하고 해방된다. 몸의 아픔에서 죄를 벗고 하나로 된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건이다. 예수의 생명을 먹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에 이른다.

십자가는 몸의 연대를 나타낸다. 몸을 두드려서 아픈 것을 알면 남의 몸 아픈 걸 헤아릴 수 있다.

나와 예수가 하나로 되는 사건이 깨달음이다. 예수가 남이 아니고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고통받는 예수가 바로 온 인류이고 나라는 깨달음, 지금 고통 당하는 사람, 신음하는 사람이 예수이고 하나님이고 우리이고 나라는 깨달음이 와야 한다. 내가 남과 하나가 되는 사건, 깨지고 깨닫는 사건에서 새 사회, 평화가 온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083&logId=1882160
 


게시물수 61건 / 코멘트수 50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2042 10-25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373 08-08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770 07-10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775 04-29
61 민중신학 대부의 아내, 박영숙 선생 별세 관리자 5533 05-21
60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민중신학은 지금도 유효” 관리자 5517 04-25
59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기독교 해방주의와 민중신학 비판 (1) 미선 7153 01-27
58 홍인식 목사 “해방신학은 행진 중” 관리자 7070 12-08
57 민중신학과 강원돈의 신학 미선이 7299 08-07
56 “민중신학, 상황신학으로 규정할 수 없어” (1) 관리자 9726 01-01
55 민중을 팔아 장사하는 민중신학자들 미선이 6752 05-11
54 [출간소식] 김명수,『큐복음서의 민중신학』(도올 김용옥 서문 | 통나무) 미선이 7139 07-07
53 故 강희남 목사의 유서…'파장' 예고 미선이 7344 06-07
52 [출간소식] 권진관 『성령과 민중』(동연) (1) 미선이 7379 05-12
51 인도에서 떠오르는 '달리트 신학' 미선이 7099 04-21
50 예수는 민중이란 것에 동의하지만…민중이 예수일까? 미선이 5837 04-08
49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에 담긴 에큐메니컬 정신 미선이 5953 03-02
48 "인민신학+민중신학=통일신학" 노정선 교수, 한국민중신학회서 주장 미선이 8632 05-26
47 권진관 교수의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이해에 대한 비평 (1) 정강길 8480 04-20
46 새로운 민중신학의 이름, <살림신학> (3) 정강길 7843 01-20
45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및 학술제를 다녀와서.. (1) 정강길 9545 10-16
44 부르조아의 하나님 : 낙타와 바늘귀, 자본주의, 제국주의 (2) 리옌화 8426 07-14
43 [펌] 깨달음의 사회화 (박재순) 정강길 8576 04-09
42 "손해보고 살자" (광주 연합예배) (6) 정강길 9021 09-11
41 "가장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하나님 나라" 정강길 7347 04-01
40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정강길 7933 03-09
39 학문은 쉬워야 함에도 요구되는 '불가피한 아카데믹함'이란? 관리자 14268 02-22
38 혀짤리고 귀먹고 화상당한 우리의 늙으신 하나님을 아시나요? (최형묵) 정강길 9256 02-01
37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송기득 교수 (정용섭) 정강길 8632 01-30
36 이론과 실천의 함수관계 (* 신학과 삶의 관계) 정강길 7837 12-16
3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후기 (2) 해조 8285 12-11
34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820 12-01
33 한국 기독교 신학의 전개과정과 새로운 전환의 신학 정강길 6478 11-14
32 정강길의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을 읽고 나서 (Dong-Sik Park) (2) 관리자 9311 10-27
31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2042 10-25
30 <백두근본주의>에 대한 고찰 정강길 7486 10-25
29 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하여~!! 정강길 7550 10-18
28 한국 민중신학자 대회를 다녀와서.. 정강길 6985 09-21
27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7) 정강길 7259 09-02
26 [펌] 내 신앙의 근본을 뒤흔든 그 말, 민중신학 (정병진) 정강길 7240 09-02
25 책을 읽고.. (김광현) 관리자 6600 09-02
24    이하 광현님과 토론글 모음.. 관리자 7077 09-02
23 민중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과정철학적 관점에서 (장왕식 교수) 관리자 7737 09-02
22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5)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③ 정강길 7726 08-14
21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4)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② 정강길 7123 08-14
20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3)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 <만무>滿無 full naug… 정강길 7795 08-14
19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2) - '영성수련'이란 <공부>工夫, Kung-Fu를 말한다! 정강길 7983 08-14
18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1) -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정강길 12242 08-14
17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373 08-08
16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770 07-10
1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정강길 6916 07-10
14 민중신학과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정강길 7489 06-17
13 '민중신학연구소' 진영과의 민중론 논쟁글 모음 정강길 7573 05-20
12 ‘다른 관심ㆍ다른 이론적 틀’ 로 논의 "현재 민중신학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 (1) 구굿닷컴 7946 05-06
11 [쟁점] 비평 - 맑스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기독교 (11) 정강길 8799 05-06
10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194 05-06
9 기존 민중신학이 안티를 걸었던 <서구신학>에 대한 의미 정강길 7297 05-01
8 서남동 신학,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9040 04-30
7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775 04-29
6 서남동, 화이트헤드를 만나다.. (5) 정강길 8213 04-28
5 민중사건 그리고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7416 04-28
4 화이트헤드에 기반한 사회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 대하여.. 정강길 7808 04-28
3 민중신학이여.. 제발! 제발! 제발! 미선이 7976 04-28
2 [탈/향 강좌]민중신학 vs. 민중신학, 성서를 읽는 천 개의 눈 (1) 정나진 15079 04-27
1 21세기에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표류할 것인가..!! 미선이 16876 04-21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