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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이하 광현님과 토론글 모음..    
  글쓴이 : 관리자 날 짜 : 06-09-02 18:37 조회(6953)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1/32 


 
* 보기에 쉽도록 효율성을 위해 글을 하나로 모아놨습니다.. 광현님은
기존의 민중신학보다는 오히려 화이트헤드 철학쪽을 더 많이 공부하신 분이라
다소 화이트헤드에 대한 전문적인 용어들로 토론이 오고간 점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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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안녕하세요.. 광현님..
좋은 질문을 해주신 거 같은데
답변은 의외로 간단할 것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낮고 단순하고 저급한 욕구를 추구하는지는
인간이라는 유기체 자체가 우주의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길들여짐에
익숙해져왔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악했다고는 보지 않고
저는 오히려 선천적으로는 <백지설>에 가까운데 단지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선행하는 우주로부터 받아온 여건들이 악한 쪽으로 이미 가 있기 때문에
후천적인 인간의 본성도 악으로 기울기 쉽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류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그 첫 단추를 잘끼워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죄악된 세상을 그 여건으로서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물려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답변이지만 부연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다음의 논의와도 연관됩니다..
화이트헤드의 저서 중 '이성의 기능'을 보면 화이트헤드는 말하길
이성을 욕망 중의 하나로 보고 있는데,(본서 p.250.각주 참조)

가장 저급한 욕망이란 몸의 반응대로 움직이는 욕구충족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갖고 싶으면 갖고, 꼴리면 하고 뭐 그런 것이져..
'내적 일그러짐'의 상태는 바로 이런 행태를 보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 때 이러한 욕망을 치리하는 이차적 욕망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이성>이란 것이죠..
이 같은 이성에 의해서 나의 욕망들은 몸의 반응에 따라
즉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자로서의 세계를 고려한 후에 반응하게 됩니다..
화이트헤드는 그래서 이성을 '욕망 중의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인간을 평가할 때 혹독하게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말은 틀린 얘기다.
인간은 단지 간헐적으로 이성적일 뿐이며
이성적으로 행위해야 할 책임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하져..
이때 이성적이라는 경우는 합리성을 쫓아가는 경우요..
그것은 곧 신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사실상 보편적 민중과 자각인의 차이는
<명제적 느낌>propositional feeling과 <지성적 느낌>intellectual feeling의 대비와 유사합니다..
자각하지 못한 내적 일그러짐을 가진 민중들은
적어도 자각인들만큼 지성적 판단이 발달하지 않은 자들인 것이죠..
명제적 느낌의 즉각적 실현은 맹목적 충동 가운데서 많이 발견됩니다..

반면에 자각인들은 세계 안의 고등한 현실적 계기들을 실현하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나 자신에게 육박해 들어오고 있는 많은 명제들을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저의 '단위행태'글 참조..) 말그대로 소위 '깨어 있는 자', '의식 있는 자'들인 것이죠..

유기체 진화의 입장에 본다면 자각인은 참으로 고등한 <신인류>인 셈이죠..
온 세상 사람들이 몽땅 예수, 석가, 간디, 함석헌 등등 이 같은 사람들이라면
과연 이 땅에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지 궁금하지 않나요?^^;;

왜 많은 민중들이 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지는
우리의 몸 자체가 태고적의 우주로부터, 선행하는 세계로부터
그렇게 이어받아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단순 욕망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세계 안의 자각치 못한 민중들은 적어도 자각인들 보다는
TV'동물의 왕국'이 보여주는 삶의 행태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바꿔 말해, 자각치 못한 인간들은 대체로 무지몽매하여
<고차원적 계기들>higher occasions을 자각인보다는 덜 실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계기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처음부터 차원 높은 계기들을 곧바로 실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끝으로 다른 얘기지만, 광현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서 느낀 점은

민중신학을 알면서 화이트헤드를 모르는 사람이 제 책을 읽을 경우와
민중신학은 모르지만 화이트헤드를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이 제 책을 읽었을 때
양자의 독해력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겪은 바에 따른다면
역시 화이트헤드를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이 좀더
제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를 보다 더 정확하고도 수월하게 이해를 하시더군요..
어떤 작품이든 그 속에 녹아 있는 철학적 맥락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언제 어디서나 매우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간단한 답변만 써놓기엔 좀 그래서인지 두서없이 얘기하다가 좀 길어진듯 합니다..
언제 한의학에 대해서도 궁금한 바 많으니 좋은 글 있으시면 올려주십시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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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님의 답은 한마디로 관습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는 말씀이시죠? 저도 이 점에 대해서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유기체철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님은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에 대한 주체의 수정은 선택적인 자유라고 말하셨습니다(226쪽). 하지만, 이렇게 본다면 악으로의 선택도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 안에서의 선택이 됩니다.
님도 이런 이유 때문에 주체적 지향이 위계적인 영원한 객체들로 되어 있고, 신의 본뜻은 그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19~220쪽). 그러나, 위계적으로 차선일지라도 분명 신으로부터 느껴진 것입니다. 결국 주체의 자유가 주체적 지향 안에서의 선택이라면 신은 여전히 악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됩니다.
또한 이런 설명은 악으로의 선택이 관습적이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관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4-03-26 16: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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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저는 답변으로 고차원적 계기들의 실현 여부 정도를 말한 것인데
광현님은 주체적 지향의 수정 혹은 선택적 자유의 문제를 말씀하셨네요..
둘은 조금 다른 차원의 논의 아닌가요..

왜냐하면 주체적 지향과 수정과 선택 자체는 보편적 민중이든 자각인이든
그 어떤 존재에게도 깔려있는 공통적인 패턴을 말한 것이기에
보편적 일반인이 왜 내적 일그러짐을 곧잘 보이며 신의 뜻을 거스르는가에 대한
답변과는 좀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관련을 말한다면, 왜 보편적 민중이 자각인보다 더
신의 주체적 지향을 거스르는가라는 얘길 할 수 있을때
저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자각인이 고차원적 계기를 더욱 많이
실현한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즉, 관습에 젖어 있다는 거 자체가 고차원적 계기로 나아가지 않고
선행하는 여건들에 대한 퇴행적인 반응에 익숙하게 젖어있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광현님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제가 잘 이해를 하기 힘들더군여..

>그러나 위계적으로 차선일지라도 분명 신으로부터 느껴진
>것입니다. 결국 주체의 자유가 주체적 지향 안에서의 선택이라면
>신은 여전히 악에 대한 책임이 있게 됩니다.
>또한 이런 설명은 악으로의 선택이 관습적이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관습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현님께서 그려놓고 계신 도식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몰라서
제가 좀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었습니다..
저역시 주체적 지향이 관습적이라고 보지도 않으니까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제가 말씀드린 관습적인 것은
주체적 지향이 아니라 여건에 대한 반응이 관습적이라는 얘기였죠..
이를테면,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상징작용'에서 말한 <반사적 행동> 같은 것일테져..

또한 영원한 객체들의 위계들이 신으로부터 온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서의 선행하는 세계들의 결과들로 인해
빚어진 여건들을 그대로 고스란히 이어받아 오고 있으며
그것을 신이 조작하거나 변질시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단지 거기에서 가장 최선의 가능태가 신의 뜻이라는 얘길 한 것뿐이져..
그러니 책임성은 여전히 세계에 있지 신에 있다고 보긴 힘들지 않나요?
신의 결과적 본성은 세계가 하는 일들을 남김없이 거둬들이고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 이런 얘기 논의들은 주체적 지향에 대한 얘기라기보다
오히려 현실적 계기의 등급에 대한 문제로서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럴경우, 보편적 일반인은 고등한 현실적 계기의 실현이
자각인들 보다는 희박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죠..

또한 주체적 지향의 수정과 선택이라는 차원은 이미 모든 현실적 계기에 깔려 있는
공통적인 패턴의 경우인지라 광현님의 애초 질문과는 무관하다고 생각됩니다..

글쎄요.. 화이트헤드도 광현님의 그 질문에 대해 자세한 기술을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심각한 고민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서 그런 게 아닐런지..

크게 보면, 광현님께서 애초에 보편적 민중이 자각인보다
왜 더욱 내적 일그러짐의 악한 행태를 많이 보이느냐는 것에 대한 질문은
왜 동물들이 사람들보다 비이성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는가 라는 질문과 크게 다르진 않다고 봅니다..
물론 동물들이 곧 보편적 민중은 아닐테지만
크게 보면 그 대비에 있어서는 별 다르지 않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 진화의 정도.. 현실적 계기로 말한다면
<강도>intensity의 느낌이 아직 덜 성숙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저의 애초 답변에선,
태고적부터 고차원적 계기로서 유기체가 등장했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란 얘길 한 것이었죠..



2004-03-27 01: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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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제 질문이 제 의도와 좀 달랐나 본데요....
제가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게 말한 것 같습니다. "왜 (자각인들과는 달리)민중들은 신의 뜻을 잘 거스르느냐?"의 의미로 이해하신건가요?
제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저의 가장 큰 의문을 좀더 정확히 얘기해 보자면, 저는 유기체철학 도식에서 주체가 자신이 되려고 하는 모습(주체적 지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처음의 주체적 지향 안에서 선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계기에서 악으로의 선택이 나타나는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악으로의 선택이 여건에 대한 관습적 반응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악으로의 선택이 관습적인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선악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악을 선택했을때 그것을 어떻게 관습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식들과 동반자살한 사람의 선택을 어떻게 관습적으로 설명할 수 있읍니까?
아니면 어떻게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안에서의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영원한 객체들의 위계들이 신으로부터 온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서의 선행하는 세계들의 결과들로 인해 빚어진 여건들을 그대로 고스란히 이어받아 오고 있으며...단지 거기에서 가장 최선의 가능태가 신의 뜻이라는 얘길 한 것뿐이져"라고 하셨는데,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 안에 악(악으로의 유도는 아닐지라도)으로의 선택의 가능성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씀인가요? 제 생각에는 선행하는 여건들이 신의 뜻에 안맞는다면 적어도(다른 경로를 통해 여건이 될 수는 있겠지만) 주체적 지향에는 포함되어서는 안될 것 같은데요.
만약 님의 생각이 주체적 지향의 위계가 선행하는 현실세계를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라면, 제가 원한 답이 될 수 있겠습니다. 신의 뜻은 아니지만 주체적 지향 안에 있는 가능태를 주체가 선택한 것일테니까요.
그런데, 정강길님은 이 책에서 주체적 지향의 수정이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 안에서의 선택이라고 하셨기에 이런 의미 또한 아닐 것 같은데...문창옥 선생님이 <화이트헤드과정첡학의 이해>에서 말씀하셨듯이(정강길님도 책에서 언급하셨지요) 주체적 지향에 대한 선택범위가 너무 넓어졌을 경우 주체적 동일성과 통일성과 부딪히게 됩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제 생각을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네요.


2004-03-29 16:5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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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질문이 전혀 다르군요.. 악으로의 선택이 관습적이라고 말한 저의 대답은
"왜 (자각인들과는 달리)민중들은 신의 뜻을 잘 거스르느냐?"의 질문일때의 답변이니
착오없으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광현님께서 "왜 많은 민중들이 자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내적인 일그러짐 속에 머무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지 않냐" 라고 쓰셨길래..
전 질문이 그쪽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쓰신 것을 봐도 광현님의 질문은 여전히 좀 애매합니다..
유기체 철학에서 왜 많은 이들이 주체적 지향에서
최초의 지향을 신으로부터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하지 못하고 왜 자꾸 다른 쪽을 선택하느냐로 질문하셨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질문하면 이또한 역시 앞의 질문과 그렇게 큰 차이가 안나기 때문이죠..

제 생각에는 차라리 다음과 같이 이렇게 질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에는 악으로의 선택적 가능성 마저 포함하고 있느냐 아니냐라고
처음부터 질문하셨다면 보다 더 논의가 클리어 했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이야말로 광현님 질문의 핵심 같은데.. 맞나요?^^;;

(-암튼 이것이 제가 이해한 광현님 질문의 핵심이라고 판단하고서 답변을 해보겠습니다.. )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있다" 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최초의 지향이 말하는 것은
신의 욕구에 의해 등급화된(혹은 가치평가된) 영원한 객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유혹 혹은 욕구의 정도가 등급화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신으로부터의 최초 지향에는
신이 가장 소망스런 가능태가 하나 들어 있는데
이 가능태가 합생하는 계기의 최초 단계에선
가장 유혹적이고 욕구가 가장 높다는 얘깁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모든 가능태들은 현실세계를 거둬들인 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여기에는 세계 안에 악을 유발시키는 가능태들도 당연히 있을테죠..
광현님은 다른 경로라는 말을 하셨는데
이것 외에 어떤 다른 경로가 있다는 얘기인지요..
분명히 신은 '구체화의 원리'로서 계기에게 개입되고 있지 않나요?

최초 지향이라는 신에 의한 강권적인 것은 아닙니다.. 호진스키도 말하듯
최초의 추제적 지향 속에는 계기가 자기를 구성할 자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초 위상에서는 순응적이기에 가장 유혹적인 '신의 소망스런 가능태'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합생의 위상이 진행될수록 다른 가능태들에 대해 유혹적 느낌을 받는 것이죠..

제가 볼 때 광현님께서 약간 모호하게 여기시는 점이 있는 것 같아
정확하게 구분하셔야 할 것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 '최초의 주체적 지향'과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 이 둘이 지시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조금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에 포함될 따름이죠..

하지만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가 가장 강렬한 유혹과 욕구를 지닌 것이기에
최초의 지향이 신의 뜻이라는 말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최초의 지향은 전적으로 신 자신이 가치평가한 가능태들입니다..

이를테면 A, B, C, D, E...라는 가능태들이 각각 있다고 할 경우
이 때 신의 소망스런 가능태가 A라고 할 때
신은 A가능태에 가장 높은 유혹 느낌을
그 다음에는 B에 A보다 약간 낮은 유혹 느낌을,
그 다음에는 C에, 그 다음은 D에.... 이런 식으로
신 자신이 모든 가능태들을 가치평가해서 계기에게 들여보낸다는것입니다..

이때 현실적 계기는 그 최초의 위상에서는
A 가능태가 가장 높은 유혹 느낌을 주고 있기에
최초 위상에선 A를 순응적으로 이어받지만
합생 위상이 더욱 진행될수록 합생 주체는 엉뚱하게 다른 가능태들인
B나 C에게서 유혹 느낌을 더 받고 선택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물들이 서로의 목적들이 어긋나게 되는 사태,
즉 세계 안에 악을 발생시키는 것이지요..

이상이 제 답변의 핵심 요지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몇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주체적 지향의 위계'라는 표현을 제가 썼던가요?
제 책에서 '가능태들 간의 위계'라는 표현은 쓴 거 같지만
'주체적 지향의 위계'라는 표현은 쓴 적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또한 주체적 지향안에서의 가능태를 주체가 선택한 것과
양립가능한 패턴으로서의 가능태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은 충돌이 나는 얘기가 아니지요..
제 책에서도 말씀드린 바지만, 주체적 지향의 수정이
주체적 동일성 혹은 주체적 통일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적 지향의 수정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제약된 자유 안에서의 자유'라는 얘기지요..

여기서 신은 실재적 가능태들이 계기에게 여건으로 작용한다고 할 때
합생하는 계기가 어떤 가능태들을 선택할 지는 신 조차도 판단할 수 없고
제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합생 주체는 맘껏 자유를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신은 정말 뭘 믿고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도박을 거는 건지.. 참 이해가 안가기도 하지요..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 세계도 모험의 과정 상에 있지만
신 역시도 <굉장한 모험가>라고 할 수 있을테죠..

글이 조금 길어졌는데
이제서야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됐는지 잘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또 미진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 다시 말씀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2004-03-31 0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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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에는 악으로의 선택적 가능성 마저 포함하고 있느냐 아니냐"

결국 제가 하고 질문의 요점은 이것이 맞습니다^^
처음 질문은 좀 다른 질문도 함께 하느라고 너무 애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한 것도 위의 질문에 대한 (결국 위의 질문으로 흘러갈) 부연설명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가 최초의 주체적 지향 속에 포함된다는 점은 제가 모호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 아닙니다.



위의 질문에 대해 포함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체적 지향이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고 한다면,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는 점은 문창옥 선생님이 주장하신 것이고 님도 동의하셨습니다.
문창옥 선생님은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책은 지금 없고 인터넷 페이지라 정확한 쪽수는 모르고 각주번호 142번 아래입니다)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가능태들이 양립가능하다라는 말을 저는 하나의 계기에서 함께 실현될 수 있다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이는 위의 인용글의 조금 아래에 있는 노보의 글 중에서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주체적 지향을 이렇게 볼때, 그 안에 현실에서 나타나는 선악의 선택지를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한강다리 난간에 올라섰습니다. 몸을 앞으로 살짝 던지는 그 동작에 대한 명령을 다리근육에 보내는 그 때에 신은 어떤 주체적 지향을 주었을까요?
분명 그 명령을 보내지 말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기는 보냈읍니다.
이 두가지 선택지를 양립가능하다고 보십니까?


2004-04-01 15: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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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광현님께서 쓰신 부분에 대해서 하나씩 말씀드려보겠습니다..


>> 김광현 님이 쓰신 내용 <<
:
: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에는 악으로의 선택적 가능성 마저 포함하고 있느냐 아니냐"
:
: 결국 제가 하고 질문의 요점은 이것이 맞습니다^^
: 처음 질문은 좀 다른 질문도 함께 하느라고 너무 애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한 것도 위의 질문에 대한 (결국 위의 질문으로 흘러갈) 부연설명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
: 그리고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가 최초의 주체적 지향 속에 포함된다는 점은 제가 모호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 아닙니다.
:
: 위의 질문에 대해 포함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 저는 주체적 지향이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고 한다면, 포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광현님의 언급은 결국,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이 양립가능한 패턴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는 악으로의 선택 가능태들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얘긴가요?

그런데 제가 앞서 말씀드린 '신이 가장 소망하는 가능태'는
그 계기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가능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가장 최상의 가능태로 계기 자신에게도,
타자들에게도, 그리고 신에게 있어서도
가장 최상으로 가치평가된 선택지입니다...

그럴 경우 최상의 가능태를 제외한 나머지는 죄다
사물의 최적의 상태에서 어긋난다고도 말할 수 있기때문에
악을 유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정도의 차이로 나뉠 따름이겠지만...

그렇다면 광현님이 보는 신으로부터의 주체적 지향은
양립가능한 패턴을 얘기할 필요도 없이
그저 단 하나만의 가능태만을 가리킨다고 봐지는데..
정말로 그렇게 이해하고 계신 건가요??


: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는 점은 문창옥 선생님이 주장하신 것이고 님도 동의하셨습니다.
: 문창옥 선생님은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책은 지금 없고 인터넷 페이지라 정확한 쪽수는 모르고 각주번호 142번 아래입니다)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 여기서 가능태들이 양립가능하다라는 말을 저는 하나의 계기에서 함께 실현될 수 있다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이는 위의 인용글의 조금 아래에 있는 노보의 글 중에서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용하신 얘기들은 저의 도식과도 별로 모순되지 않는 얘깁니다..
(노보의 말은 어느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는 잘모르겠지만..)

혹시 양립가능하다는 의미를
조금은 저와 다르게 이해하시는 것인지요..
화이트헤드의 도식에서, 양립가능 하다는 얘기는
주체적 지향과 관련한 것이라기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범주적 제약'의 가장 첫번째 것에 해당하는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 사태입니다..

이것은 주체적 지향을 논하기 이전에
매우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는 의미입니다..
'양립가능한 패턴으로서의 가능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현실적 계기의 입각점에 한정되며
주체적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실현가능한 모든 선택지들은
죄다 양립가능한 선택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저는 주체적 지향을 이렇게 볼때, 그 안에 현실에서 나타나는 선악의 선택지를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광현님이 말하시는, 선악의 선택지를
모두 담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는지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되는군요.. ㅡㅡ;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려고 한강다리 난간에 올라섰습니다. 몸을 앞으로 살짝 던지는 그 동작에 대한 명령을 다리근육에 보내는 그 때에 신은 어떤 주체적 지향을 주었을까요?
: 분명 그 명령을 보내지 말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기는 보냈읍니다.
: 이 두가지 선택지를 양립가능하다고 보십니까?

--> 물론 양립가능하지요.. 예를 드신 경우에서 -제 생각엔
예를 드신 사례가 보다 세분화되지 않은 좀 뭉뚱그려진 사례로 보지만-
기본적으로 계기가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들은 양립가능한 것들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죠..

어떤 사람이 사거리 한복판에 있다고 할 때
왼쪽으로 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왼쪽보다 오른쪽에 더 큰 유혹을 느낀다고 해서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이 선택지 둘은 -물론 그것이 서로 반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는 '서로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얘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양립가능 하지 않은 선택지를 들라고 한다면
공중으로 치솟는 경우일테죠.. 계기의 현실에서 볼 때
이는 불가능한 선택지니까요..

암튼 저도 두서없이 써내려갔지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료하게 잘 전달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ㅡㅡ;


2004-04-01 2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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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먼저 전에 인용한 문창옥 선생님의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 내용을 앞뒤 내용까지 함께 옮겨보겠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신에게서 파생되는 최초의 지향이 '가능태들의 동일적인 패턴'이라고 하였다. 이 패턴은 하나의 동일성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노보는 최초의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으로서의 주체적 지향은 한정성의 복잡한 여러 패턴들 가운데 임의의 패턴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런 한정성의 패턴들 하나하나는 계기가 계승한 한정성과의 종합을 위해 이와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프랭클린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동일성 및 통일성이라는 관념과 조화되기 어렵다."

노보의 글을 보면 노보가 양립이라는 말을 두 측면에서 쓰고 있는데,
첫째로 "이런 한정성의 패턴들 하나하나는 계기가 계승한 한정성과의 종합을 위해 이와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에서 '양립'가능은 그 계기에서 각각의 패턴들이 최종적인 주체적 지향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둘째로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에서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은 패턴들이 함께(!) 최종적인 주체적 지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노보가 주체적 지향 속에 여러 패턴이 있다고 한 것은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가능태들이 있고 함께 실현될 수 없는 가능태들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노보와는 달리 님은 양립을 "주체적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실현가능한 모든 선택지들은 죄다 양립가능한 선택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첫째 쓰임일 뿐 둘째 쓰임은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가능태도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에 포함된다고 하셨으니, 노보가 둘째 쓰임에서 양립불가능하다라고 한 것도 님에게는 양립가능하다고 이해해도 될 것 같은데요.
물론 노보는 패턴들간의 양립을 말한 것이고 님은 가능태들간의 양립을 말한 것이지만, 양립의 의미만 보자면 이때에는 대립된다는 것입니다.

문창옥 선생님은 "이 패턴은 하나의 동일성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선생님이 말하는 양립은 님이 말하는 양립과 달라 보입니다.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로 봤을때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가능태들은 어느 하나가 실현되면 다른 것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각주140번을 봐도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주는 '패턴'에 대한 주입니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패턴이라는 말은 '술어적 패턴'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개념을 통해, 명제의 술어가 영원적 객체들의 복합체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패턴이란 말은 그냥 영원한 객체들의 묶음이 아니라, 명제의 술어가 될 수 있는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입니다. 하나의 명제에서 술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서로 대립되는 영원한 객체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대되는 내용이 함께 술어가 된다는 것은 모순이니까요.

제가 이해하기에 이 글에 나타난 문창옥 선생님의 '양립'의 의미는 님의 의미와 다릅니다. 거기에는 주체적 지향에서의 가능태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노보가 말한 양립의 쓰임 중 두번째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은 실현가능한 선택지들은 모두 양립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체적 지향은 분명 실현가능한 것으로 주어집니다. 실현불가능한 것을 주체적 지향으로 준다면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계기가 생길 것이니까요.
실현가능의 의미라면 주체적 지향에 굳이 양립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문창옥 선생님은 노보의 의견에 대해 주체적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이라면, 주체의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와 조화되기 어렵다고 비판하십니다.
그 비판의 근거로 든 노보의 말은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일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노보의 두번째 양립이라는 말의 사용입니다. 이 외에는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와 부딪힐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노보가 주체적 지향이 패턴들이라고 한 것 외에는 님의 의견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가 실현되면 반대되는 것은 배제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점(상호간의 양립불가능)이 바로 문창옥 선생님이 동일성과 통일성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한 부분이구요.


2004-04-07 17: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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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광현님 쓰신 글을 보고서 제가 문창옥 선생님의 그 책을 다시한번 더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봐도
저와 무엇이 부딪히는 건지 제가 아둔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도무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한계일테죠..ㅡㅡ;
참고로 제 책의 '화이트헤드 <주체적 지향>에 대한 신학적 고찰'부분은
문창옥 선생님께서 전체 글 가운데서도 가장 꼼꼼히 체크해주신 글이기도 합니다만..

암튼 저는 앞서 <양립가능성>의 의미가 기본적으로는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한 주석작업때의 언급을 잠시만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i) The Category of Subjective Unity. The many feelings which belong to an incomplete phase in the process of an actual entity, though unintegrated by reason of the incompleteness of the phase, are compatible for integration by reason of the unity of their subject. 현실적 존재의 합생은 '창조적 전진'의 과정이다. 그것은 '양립 가능한' 다수의 여건들을 '대비'로 통합하여 '새로운' 일자를 낳는 과정이다. 여기서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는 현실적 존재의 합생, 즉 창조적 전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기술하고 있다. 창조적 전진은 다에서 일로의 과정이다. 이 과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가 일로 통일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다가 일로 통일된다는 것은 다가 일로 단순히 환원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가 제각기 동일성과 차이성을 지닌 채 대비를 이루어 통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대비를 통한 통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인 여건들이 양립 가능한 것들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양립 가능성>을 규정하고 있는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는 세계의 창조적 전진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 이것에 반하는 모든 입장은
저의 입장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일단 이점을 염두에 두시고서 하나씩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김광현 님이 쓰신 내용 <<
:
: 먼저 전에 인용한 문창옥 선생님의 <화이트헤드과정철학의 이해> 내용을 앞뒤 내용까지 함께 옮겨보겠습니다.
:
: "앞에서 우리는 신에게서 파생되는 최초의 지향이 '가능태들의 동일적인 패턴'이라고 하였다. 이 패턴은 하나의 동일성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노보는 최초의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신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파생된 것으로서의 주체적 지향은 한정성의 복잡한 여러 패턴들 가운데 임의의 패턴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이런 한정성의 패턴들 하나하나는 계기가 계승한 한정성과의 종합을 위해 이와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 이런 주장은 프랭클린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동일성 및 통일성이라는 관념과 조화되기 어렵다."
:
: 노보의 글을 보면 노보가 양립이라는 말을 두 측면에서 쓰고 있는데,
: 첫째로 "이런 한정성의 패턴들 하나하나는 계기가 계승한 한정성과의 종합을 위해 이와 양립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에서 '양립'가능은 그 계기에서 각각의 패턴들이 최종적인 주체적 지향이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합니다.
: 둘째로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에서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은 패턴들이 함께(!) 최종적인 주체적 지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 노보가 주체적 지향 속에 여러 패턴이 있다고 한 것은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가능태들이 있고 함께 실현될 수 없는 가능태들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
: 노보와는 달리 님은 양립을 "주체적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실현가능한 모든 선택지들은 죄다 양립가능한 선택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 이것은 위에서 첫째 쓰임일 뿐 둘째 쓰임은 아닙니다. 서로 반대되는 가능태도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에 포함된다고 하셨으니, 노보가 둘째 쓰임에서 양립불가능하다라고 한 것도 님에게는 양립가능하다고 이해해도 될 것 같은데요.
: 물론 노보는 패턴들간의 양립을 말한 것이고 님은 가능태들간의 양립을 말한 것이지만, 양립의 의미만 보자면 이때에는 대립된다는 것입니다.
:

-저는 애초부터 노보와 달리 최초의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이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럴경우 이것은 문창옥 선생님께서 위에 쓴대로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부딪힐 수 있으니까요..
양립가능한 가능성의 패턴이란 것 자체가
술어적 패턴에 속하는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인데
이런 것이 또 다수가 있다는 얘기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 않나요?
노보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얘길 한 것인지는 저로선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런점에서도 문창옥 선생님 역시
노보의 주장에 대해 반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책을 보면 문창옥 선생님의 경우는 최초의 지향을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동일적인 패턴'(p.169)으로 보고 있지요..
이것은 노보가 말한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과는 엄밀한 다른 의미 아닌가요?
실상 가만히 들여다보면 노보의 언급은 애초부터 양립가능성의 의미를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서
그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광현님은 이 점을 오해하신 채로 저한테 논지를 전개하신 바라
저의 대한 반론의 성립 자체부터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제가 보기에 광현님의 글에서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과
님이 표현한 '최종적 주체적 지향'은 계기가 볼 때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 구분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보입니다..
최종적 주체적 지향은 development of subjective aim을 겪은 뒤의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실현한 가능태를 제외하면 이미 다른 가능태와는
양립불가능한 것이 되버리는 것이져.. 이점은 다음의 글에서도
여지없이 광현님께서 구분치 않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요..



: 문창옥 선생님은 "이 패턴은 하나의 동일성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이 패턴 내의 가능태들은 양립 가능한 선택지들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 문선생님이 말하는 양립은 님이 말하는 양립과 달라 보입니다. 어느 하나의 실현은 다른 것을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로 봤을때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가능태들은 어느 하나가 실현되면 다른 것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달라보인다고 하셨는데 다르지 않습니다.. 님은 여기서 스스로 시인하고 계십니다..
즉, 광현님은 여기서 문창옥 선생님이 말씀한 "어느 하나의 실현"이라는
그 상황 자체는 빼먹고 말하고 있는거죠.. 이것은 님스스로 다시 또 말한
"어느 하나가 실현되면"이라고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언급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주체적 지향이란 님이 앞서 표현한 '최종적 주체적 지향'일 것입니다..



: 각주140번을 봐도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주는 '패턴'에 대한 주입니다.
: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패턴이라는 말은 '술어적 패턴'이라는 화이트헤드의 개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화이트헤드는 이 개념을 통해, 명제의 술어가 영원적 객체들의 복합체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 패턴이란 말은 그냥 영원한 객체들의 묶음이 아니라, 명제의 술어가 될 수 있는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입니다. 하나의 명제에서 술어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서로 대립되는 영원한 객체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대되는 내용이 함께 술어가 된다는 것은 모순이니까요.

-(각주140번이란 게 몇페이지인가요? 제꺼는 초판인데 좀 다른건가요?
아마도 p.169. 28번 각주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

그 계기에 있어 명제의 술어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여건과 합생의 범주적 조건의 제약으로서의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일테죠..
예컨대, 앞서 예를 든 사거리의 경우.. 이를 물리적 느낌이라고 할때
왼쪽 선택지와 오른쪽 선택지는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님은 반대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신 건가요?



: 제가 이해하기에 이 글에 나타난 문창옥 선생님의 '양립'의 의미는 님의 의미와 다릅니다. 거기에는 주체적 지향에서의 가능태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노보가 말한 양립의 쓰임 중 두번째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 님은 실현가능한 선택지들은 모두 양립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체적 지향은 분명 실현가능한 것으로 주어집니다. 실현불가능한 것을 주체적 지향으로 준다면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계기가 생길 것이니까요.

-위의 이 말은 제게는 더더욱 이상하게 들립니다..
실현가능한 선택지들은 모두 양립가능한 것이지요..
저는 앞서 양립가능의 의미가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 언급이라고 분명하게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적 지향 역시 분명 실현 가능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요..
그런데 제가 실현불가능한 것을 주제적 지향으로 준다고
주장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얘길 제게 하시는지요..



: 실현가능의 의미라면 주체적 지향에 굳이 양립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 문창옥 선생님은 노보의 의견에 대해 주체적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이라면, 주체의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와 조화되기 어렵다고 비판하십니다.
: 그 비판의 근거로 든 노보의 말은 "이들 모두가 그 계기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상호간에 양립하는 것들은 아니다"일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노보의 두번째 양립이라는 말의 사용입니다. 이 외에는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와 부딪힐 말이 없습니다.
: 여기서 노보가 주체적 지향이 패턴들이라고 한 것 외에는 님의 의견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하나가 실현되면 반대되는 것은 배제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점(상호간의 양립불가능)이 바로 문창옥 선생님이 동일성과 통일성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한 부분이구요.

-위의 글 역시 앞서 제가 지적한 점들을 잘 고려치않고서
하시는 얘기일뿐입니다..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저는 솔직히 광현님의 언급에 대해서 어떤 그림을 갖고서
제게 얘기하시는 것인지 그 그림이 명확히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윗글에서 볼 때도 제가 노보와 다르다는 건지 아니면
문창옥 선생님과 다르다는 건지..아니면 셋 다 제각각이란 건가요?
기본적으로 광현님 스스로 구상하고 계신 그림부터가
선명치가 않아서 어떤 이해의 관점에서 제 얘길 보고 계신건지
죄송하지만 제 솔직한 느낌은 광현님의 글이 저로서는
조금 뒤죽박죽 되는 도식으로서 절 보시는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요..ㅡㅡ;

예컨대, '최초의 주체적 지향', '신의 소망스런 가능태'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
'최종적 주체적 지향' 등등 이런 점에 대한 구분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암튼 제가 볼 때는 광현님과는 용어나 표현의 개념상에서부터
어느 정도 조율이 서로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ㅡ.ㅡ

그리고 논의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광현님 말씀처럼
악을 유발하는 선택지가 애초에 신으로부터의 최초의 지향에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도대체 그 가능태는 어디로부터 온건가요?
그 가능태의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인가요?
혹시 지금 논의에서 무신론적 해석을 행여나 끄집어내신다면
또 논의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기에 더 뒤죽박죽된다는 점은 잘 아실테죠?^^;;


2004-04-07 23: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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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먼저 몇가지 해명해야 할 것이 있네요.
님이 답답해 하시듯이 저도 제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저는 님이 주체적 지향을 노보처럼 최초의 지향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이라고 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선생님, 정강길님, 노보 각각 주체적 지향을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강길 님의 생각이 문창옥 선생님보다 노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밑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님이 최초의 주체적 지향 속의 여러 가능태들 중에서 주체가 선택한 하나가 최종적인 주체적 지향으로 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에 대해서는 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님이 실현불가능한 것이 주체적 지향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주체적 지향은 실현가능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주체적 지향을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고 당연한 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문창옥 선생님이 여기서 말한 '양립'이 실현가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지향 속의 가능태들의 상호간의 양립이란 말입니다.

*'최초의 주체적 지향', '신의 소망스런 가능태',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 '최종적 주체적 지향' 등등 이런 점에 대해 님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구분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한 계기가 신에 대한 물리적 파악을 통해 신으로부터 받은 주체적 지향입니다.
'신의 소망스런 가능태'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 속의 여러 가능태 중에서 신이 가장 실현되기를 원하는 가능태입니다.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에 대해서는 님과 문창옥 선생님의 생각이 다르다고 보는데, 님은 반대되는 가능태들도 포함한 개념으로 보고 있고, 문선생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밑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은 노보가 직접 쓴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보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이 여러 패턴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최종적 주체적 지향'은 최초의 주체적 지향 중에서 주체가 결단을 통해 선택한 것입니다.

* 저는 무신론적 유기체철학을 모색해 보고자 하지만, 아직 체계적인 도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대화에서는 전혀 그것을 바탕으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기체철학에서의 신으로부터의 최초의 주체적 지향과 그에 대한 주체의 자유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패턴에 대한 각주번호는 제가 전에 문선생님 홈페이지에 있던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 전문에서 보고(아직 검색상에서는 보입니다) 적은 것으로 책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인용한 글 조금 앞에 있는 각주입니다. 정확한 인용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도 책이 없어서...



이제 먼저 말씀드린 제 생각을 부연설명하죠.

이번 님의 답변에서 "양립가능한 가능성의 패턴이란 것 자체가 술어적 패턴에 속하는 영원한 객체들의 복합체인데, 이런 것이 또 다수가 있다는 얘기는 좀 이해하기 힘들지 않나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님과 저의 의견차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노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문선생님의 인용만 보고 추측한 것이지만) 노보가 패턴'들'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의 패턴에 반대되는 가능태를 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패턴은 그냥 가능태들의 묶음이 아니라,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가능태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문선생님의 '패턴'에 대한 각주를 들어 말씀드렸죠. 하나의 패턴은 하나의 명제의 술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님이 말한 사거리의 예에서 '그는 왼쪽으로 간다'와 '그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각각은 가능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간다.'는 명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을 노보는 다른 여건들과는 각각 양립가능하나 상호간에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패턴이란 말을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이해한다면 왼쪽과 오른쪽은 하나의 패턴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보는 패턴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제가 정강길님이 노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물론 여러 가능태들이 하나의 패턴이 될 수는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다'와 '빨리 가다'는 함께 실현 가능합니다.

노보의 의견은 주체의 폭넓은 선택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으나, 문창옥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주체의 동일성을 설명하기 곤란합니다.
그래서, 문창옥 선생님은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패턴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패턴 속의 가능태들은 함께 실현될 수도 있으니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고 해도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함께 실현되면서 그 중 하나가 강조되는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도 선택가능성을 남겨두면서 주체의 동일성과 충돌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듯 합니다.

정강길님은 주체적 지향의 동일성과 '폭넓은'선택가능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같이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함께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생기는 다른 하나의 배제를 무시하고, 최초의 지향과 마지막 지향이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능한 동일성이지 하나의 동일성이 아닙니다.

최초의 주체적 지향이 반대되는 가능태들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주체적 지향 내의 여러 가능한 동일성들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노보와 비슷한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어떤 것이 되고자 했을때 그 속에 반대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여러가지 가능한 것들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를 희망하는 것입니까?

원래부터 주체의 동일성과 주체의 자유의 문제는 서로 모순된 문제입니다. 문창옥 선생님도 인용글의 앞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접점으로 문선생님은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에서'(아시겠지만 주체적 지향은 명제입니다) 술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이면서, 그 패턴 안에 여러 가능태들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의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제한된 자유입니다.


제 의문을 풀고 싶어 님을 자꾸 귀찮게 하게 됩니다. TT
물론 제 생각이 전혀 문창옥 선생님의 의미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맞았든 틀렸든 간에 님이 허락하는 한에서 의문이 풀릴때까지 계속 대화를 청하려 합니다



2004-04-08 15: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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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서로가 첨예하게 엇갈린다고 보여지는
매우 핵심적인 부분만 짚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생각에는 밑의 글에서 광현님이 저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봅니다..



>> 김광현 님이 쓰신 내용 <<
: 님이 말한 사거리의 예에서 '그는 왼쪽으로 간다'와 '그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각각은 가능하지만, 동시에 '그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간다.'는 명제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을 노보는 다른 여건들과는 각각 양립가능하나 상호간에 양립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 패턴이란 말을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이해한다면 왼쪽과 오른쪽은 하나의 패턴 속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보는 패턴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제가 정강길님이 노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 물론 여러 가능태들이 하나의 패턴이 될 수는 있습니다. '왼쪽으로 가다'와 '빨리 가다'는 함께 실현 가능합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결정적 이해의 큰 차이가 느껴지네요..
사거리의 예에서, '그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간다'라는 명제는 당연히 불가능하죠..
전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광현님은 여기서 제가 앞서 지적한 바 있는
'최초의 주체적 지향'과 '최종적 주체적 지향'을 구분하지 않고서
여전히 이해하시기에 위에처럼 얘기하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최초의 위상에서 볼 때, 사거리의 예에서 술어적 패턴으로서의
가능태들은 왼쪽, 오른쪽, 윗쪽, 아랫쪽 이것 모두가 가능한 선택지라는 얘기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빨리가다A 천천히 가다B라는 가능태도 더 곁들여보지요.
제게는 이것 자체가 한 묶음의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에 놓여 있구요..

이때 신의 주체적 지향을 '왼A'라고 합시다..
그 다음 차선은 '왼B'쯤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development of subjective aim을 거쳐
결국에는 최종적 주체적 지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즉, 이것이 바로 양립가능한 선택지들의 제거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계기의 결단은 자율성을 갖기에 신의 부르심과는 다른 선택지들..
그러니까 '오A' 혹은 '오B'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이져..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왼A'하고는 양립불가능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문창옥 선생님도 말씀한
제약된 자유 안에서의 자유,
주체적 통일성 안에서 수정된 자유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창옥 선생님의 그것과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요?

광현님이 저의 도식을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은, 전적으로 저의 얘기에서
development of subjective aim를 빼먹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최초의 위상에서는 왼쪽도 오른쪽도 같이 가능하고
술어적 패턴에 같이 엮여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합생적 위상이 진행될수록 결국 양립불가능해지는 거죠..

노보가 최초의 지향을 '다수의 가능적인 동일성의 패턴들'이라고 본다고 말한 것은
문창옥 선생님의 책에 나와서 한 얘기입니다..
물론 제가 노보의 책을 직접 봐야 할테지만 적어도 인용된 문구만 볼 경우
노보의 언급에서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 점은 전혀 발견하기 힘들었다 봅니다..

그런데 제가 노보처럼 그렇게 안보는 줄을 아시면서 왜 저와 노보가 비슷하다고 하시는지요..
저역시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이라고 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잖아요..

최초의 지향은 등급화된 가능태들 패턴이며, 그것은
신의 주체적 지향에 비추어 정연하게 가치평가된 것들입니다..
하지만 계기의 위상이 진행될수록 그 패턴안에서
계기는 신과 다른 가치평가를 내림으로서
관련된 선택지들은 결국 양립불가능해져버리는 거죠..

<양립가능>이란 말은 미실현의 경우에 쓰일 수 있지 실현의 경우에는
왼쪽과 오른쪽은 동시에 양립가능이 가능하지 않지요..
그래서 이것은 주석작업때 정리해놨듯이
양립가능성의 의미는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관련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아마도 서로의 글에서 약간의 조율되지 않은 미숙한 의사표현 때문에
서로가 조금 클리어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드신다면 언제든지 질문 가능하고
저역시 성심껏 답변해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ㅡ.ㅡ



2004-04-08 21: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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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제 글을 다시 읽다보니 중요한 부분에 잘못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서야 발견했습니다.
저는 패턴이라는 말에 반대되는 가능태들을 함께 담을 수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류가 있는 명제도 명제이므로, 내적으로 오류가 있는 술어적 패턴도 가능할 것이기에 패턴이라는 말에 대한 제 이해는 잘못된 것이네요.
이때문에 논의의 진행이 껄끄러웠던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패턴은 주체적 지향 속의 명제의 술어인데, 주체적 지향은 오류가 없는 실현가능한 명제에 대한 느낌이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제 질문은 아직 유효합니다.


제 생각을 명제의 차원에서 접급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명제적 느낌에 속한다는 것이 많은 과정철학자들의 생각이고, 님도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이에 동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주체적 지향이 명제적 느낌이라는 것은 최초의 지향이든 최종적인 지향이든 주체적 지향 모두에 해당될 것입니다.
반대되는 가능태들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 최초의 주체적 지향은 '하나의' 명제에 대한 느낌이 될 수 있을까요?
님이 예를 들은 가능태들로 최초의 지향을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본다면, "나는 왼쪽 오른쪽으로 천천히 빨리 간다"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이 명제는 내적인 모순이 있고, 실현불가능합니다. 님도 얘기하셨듯이 주체적 지향은 실현가능해야 하기에, 반대되는 가능태들이 포함된 최초의 지향은 하나의 명제에 대한 느낌이 될 수 없습니다.

위의 가능태들을 내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명제로 만들어 본다면, 님이 예를 든 것 같이 여러개의 명제'들'이 될 것입니다.
'나는 왼쪽으로 천천히 간다' '나는 왼쪽으로 빨리 간다' 등등....
이 경우 최종적인 지향은 이 명제들 중 하나이거나 그 하나에 대한 내적인 수정이 될 것입니다.
여러개의 가능한 명제들 중의 하나의 선택, 이것은 문선생님이 주체의 동일성과 통일성과 조화될 수 없다고 비판하신 것입니다.

노보가 말한 패턴들이란 위에서 예를 들은 여러 명제들의 술어들입니다. 노보는 다양한 선택지들을 담기 위해서 최초의 지향은 여러 명제들이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님의 의견이 문선생님보다 노보와 가깝다고 한 이유가 이때문입니다. 주체적 지향에서 하나의 명제(패턴)에 반대되는 가능태들을 담을 수 없기에, 결국 여러 명제(패턴)들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창옥 선생님은 이 문제를 알고 계셨고,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를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문창옥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하나의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 속에는 반대되는 것들이 함께 들어있지는 않지만, 함께 실현가능한 다양한 것들이 포괄적으로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손을 흔들며 웃는 얼굴로 왼쪽으로 빨리 간다'의 경우 내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실현가능합니다. 최종적인 지향은 이 여러 가능태 들 중의 부분적인 선택입니다.
이 견해에서 최초의 지향은 하나의 명제이고, 최종적인 지향은 이 하나의 명제 안에서의 수정(부분적 선택)이므로, 주체적 동일성과 통일성의 범주와 크게 부딪히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했을때 문창옥 선생님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지만, 문선생님 견해로는 제가 처음에 질문한 신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에 질문한 의문점이었는데, 문선생님의 주장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2004-04-12 14: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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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과정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몇 가지만 다시 답변드리겠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오류가 없는~"이라는 얘기는 어떤 뜻인가요?
제가 볼 때 오류는 결국 계기가 신이 소망한 가능태를 선택하지 않고
이를 수정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인간세에서 이것은 악으로 나타나는 것이구요..
이 점은 화이트헤드가 악을 사물이 엇갈린 목적의 상태에 있을때
나타난 것으로 봤던 점과 정확히 일맥상통한 얘기이죠..

또한 노보가 여러 명제라는 말은 그 명제의 주어도 역시 여러개라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그런점에서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부딪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명제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현실적 계기 또는 결합체에다가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영원한 객체들이
융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명제를 불순한 가능태라고 하는 것일테죠..

게다가 광현님은 문선생님이 말씀한 수정은 인정하시면서
그렇지만 역시 악으로의 선택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좀 이상한 얘기로 들립니다..

혹시 광현님께서는 '수정'이란 것을
'악으로의 선택'과 별개의 다른 것으로 이해하시는지요..?
신이 소망한 선택지를 선택하지 않은 그 '수정'이 바로
'오류'와 '악’의 발생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

최초의 지향이 수정된다는 것은 여러 선택지에 대한 등급화
즉 가치평가를 신과 다르게 내린다는 얘기입니다..
호진스키(T. Hosinski)는 이를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죠..
그래서 최초의 지향에는 자기 구성의 자유(수정)가 포함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에게서의 악이란 일종의 건넘돌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오류와 비극 앞에 겸허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죠..



2004-04-12 1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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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앞서 말씀드린 것중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점들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시네요.
일단 님이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오류가 없는~"이라는 얘기는 어떤 뜻인가요?
: 제가 볼 때 오류는 결국 계기가 신이 소망한 가능태를 선택 하지 않고 이를 수정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님이 말씀하신 것이 주체적 지향의 오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린 오류는 명제 자체의 내적인 모순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는 왼쪽 오른쪽으로 빨리 천천히 간다"는 명제는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체적 지향은 실현가능해야 하므로, 이런 명제는 주체적 지향 속의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오류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 또한 노보가 여러 명제라는 말은 그 명제의 주어도 역시 여러개라는 건가요?
: 만약 그렇다면(그런점에서 주체적 통일성의 범주와 부딪히는 것이기도 하지만..)
: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의 명제라는 것 자체가
: 하나의 현실적 계기 또는 결합체에다가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영원한 객체들이
: 융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명제를 불순한 가능태라고 하는 것일테죠..]

-->노보가 말한 패턴들(명제들)의 주어는 주체 자신이므로 하나입니다. 하나의 주어로 여러 명제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저도 하나의 명제에 여러 영원한 객체들이 융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보가 생각한 최초의 지향이 여러 명제들이라는 얘기는 주체적 지향이 실현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했을때, 반대되는 가능태들이 하나의 명제에서 술어가 될 수 없기에 한 말입니다.

[게다가 광현님은 문선생님이 말씀한 수정은 인정하시면서
: 그렇지만 역시 악으로의 선택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하셨는데..
: 이것은 좀 이상한 얘기로 들립니다]

-->문선생님이 말씀한 수정이 좁은 범위 안에서의 수정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위에서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 문선생님이 말씀하신 양립가능한 가능태들의 패턴 속에는 반대되는 가능태들이 포함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보이는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적 지향이 명제적 느낌에 속하다는 얘기부터 마지막 결론까지 제 추론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 부분을 짚어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위의 지적들을 보면 제 글 각 부분을 잘라 보신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반대되는 가능태들이 포함된 것이라면, 최초의 주체적 지향이 하나의 명제에 대한 느낌일 수 있는가?'
'하나의 명제에 대한 느낌일 수 있다면, 반대되는 가능태들로 인한 그 명제의 실현불가능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또는
'최초의 지향이 여러 명제들에 대한 느낌이고 최종적인 지향은 이들 중의 선택이라면, 주체적 동일성과 통일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최초의 지향이 함께 실현될 수 있는 가능태들로 구성되어 있고 최종적인 지향은 이들 중의 선택이라면, 현실에서 보이는 신의 뜻과 반대되는 선택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등 입니다.



2004-04-13 15: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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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길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광현님.. "나는 왼쪽 오른쪽으로 빨리 천천히 간다"라는 명제를
말씀하셨는데 이런 명제는 당연히 주체적 지향에 들어올수도 없지요
이런 명제는 불가능합니다.. 아예 양립불가능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제가 쓴 글 다시한번 보세요.. 저는 이런 명제를 말한 적도 없습니다..

노보에 대한 언급들은 본래 논쟁의 와중에 끌여들여진 것이기도 하지만
제가 직접적으로 노보의 책을 살펴보진 못한바라 부득이하게
전적으로 문선생님의 노보 이해에 따를 따름이라 냉정하게 말해서
확정적으로는 제 입장에서 뭐라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명제가 여러개 있다는 것과 영원한 객체가 여러개 붙는다는 얘기는
엄밀히 말한다면 둘은 서로 다른 것이지요..
명제가 여러개 있다고 할 경우에는
주어 하나에 각각의 가능태들이 붙는 경우도 해당되겠지만
주어가 다른 명제가 여러개 있을 수 있다는 얘기까지도 포함되니까요..

또한 광현님은 "문선생님이 말씀한 수정이 좁은 범위 안에서의 수정의 성격"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좁은 범위라는 것은 전적으로 광현님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는 범위의 넓고 좁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체적 통일성 안에서의 수정을 말한 것이지요..

게다가 <수정> 자체가 악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선 부정하시는 건가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이 <수정>은 신의 뜻과 반대되는 가능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바로 그 <수정>입니다..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광현님의 글을 잘라보신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서로의 이해가 다른 구도에 있기 때문에
저의 답글을 이해못하고 계신 것으로 생각될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기선 또다시 '명제'라는 개념이
저와 다르게 이해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위에 글을 보면 광현님은 분명히 수정 자체는 인정하셨습니다..
(그것이 광현님 표현식으로 '좁은 범위'든 '넓은 범위'든 간에)
그런데 여기서 이 같은 수정 자체가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곰곰히 한 번 생각해보십시요..

그것은 명백히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서의 수정이기에
논리적 주어는 같지만 술어는 다른 명제가 여러 개라는 의미 아닌가요?
즉, 하나의 명제가 아닙니다.. 혹시 광현님께선 '하나의 패턴=하나의 명제'이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떻든 하나의 명제가 아니며, 양립가능한 명제들이 과정상에 개입되는 것이죠..
그리고 물론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명제는
합생하는 계기의 결단에 의해 선택받은 하나의 명제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신의 뜻이든 악의 길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여건과 합생의 범주적 제약 안에서의
<여러 가능태들에 대한 선택>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혹시 또 이의가 있으시거나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
다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괜찮다면
그 전에 먼저 개념에 대한 점검도 같이 해보면서 말씀해주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되며, 이 점에서 저는 문선생님 책도 괜찮지만
가능하면 호진스키의 책을 더 권하고 싶은 맘도 있습니다..
상당히 개념접근이 용이하게 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럴경우 좀더 서로 간의 대화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4-04-14 02: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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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님의 글




제 예상과는 달리 최초의 지향이 하나의 주어를 가진 여러 명제들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님은 이 문제를 참 간단하게 바라보시네요.
여러 명제들 중 하나의 선택을 동일성을 잃지 않은 수정으로 보시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과정철학자들간의 논란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님과 저의 의견차이는 바로 이점이 되겠네요.

님이 지적하셨다시피 제가 문창옥 선생님의 생각일 것이라고 말한 하나의 포괄적인 명제 안에서의 가능태들의 선택 또한 여러 명제들 중의 하나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님의 의견과 달리 하나의 명제에서 선택한 하나의 명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하나이면서도 선택가능한 여럿이 되는 절묘한 답이 되는 것입니다.


2004-04-16 17:37:35




===============================================================


정강길


눼에..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명제라는 것이
긍정-부정의 대비라는 사실은 광현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저의 얘기가
화이트헤드의 전체 체계와 어긋난 얘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또한 과정철학자들의 논란을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기에는
주체적 지향의 수정 문제가 전체 논의꺼리들 중에서 그렇게
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과정철학자들이라고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들 역시 많은 논의들 가운데서 헛점과
구멍 뚫린 얘기들을 곧잘 보여주곤 했었습니다..

어쨌든 주체적 지향 수정에 있어서 제가 쓴 내용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바라
언제든지 명료하게 지적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하신 "하나의 명제에서 선택한
하나의 명제라고 볼 수도 있다"는 광현님의 표현은 솔직히
제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되네요.. ㅡㅡ;;

어떻든 좋은 논쟁과 정합적인 비판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봐집니다..ㅡ.ㅡ



2004-04-17 05: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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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 김광현 
 

 
제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컴퓨터를 한동안 사용하지 못하면서 뜻하지 않게 아무 얘기도 없이 토론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가장 궁금한 점 하나만 더 여쭤보려고 다시 글을 올립니다.
 
처음부터 주욱 다시 읽어보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문창옥 선생님의 견해에 대한 이해의 엇갈림은 아직 남아있지만, 문선생님께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더 얘기해도 진전이 없을 것 같구요.

다만, 최초의 지향이 반대되는 것도 포함하는 여러 명제들이라고 한다면, 그로 인해 그 현실적 존재 속의 하나의 느낌에서 발생하는 주체적 형식 또한 여럿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느낌의 주체적 형식은 여건에 대한 주체의 반응으로 결국 주체적 지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데, 최초의 지향 속에 여러 반대되는 명제들이 포함된다면 여건에 대한 반응 또한 반대되는 것도 포함된 여럿이 될 것입니다.

화이트헤드가 생각했던 최초의 지향이 님과 같았다면 주체적 형식의 가능한 다양성에 대해 언급했을만도 한데, 그런 구절은 없지 않나요?

느낌 뿐 아니라 부정적 파악에서도 그 기준은 주체적 지향일 텐데, 최초의 지향을 넓은 범위로 이해한다면 최종적 지향이 결정될 때까지는 부정적 파악에서의 배제도 결정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요?
 
이 문제를 저는 주체적 통일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2004-07-23 13: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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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응답
 
 
 
일단 주체적 통일성을 양립가능성에 따른 것으로 보셔야져..
최종적 만족이란 것은 하나의 종속적 파악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생적 고찰에 있어 파악은 여럿 가능합니다..
물론 이것들은 양립가능한 것으로서의 주체적 통일성 안에서죠..
파악들이 있는 만큼 여건을 느끼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 또한 여럿 있는 건 아닌가요?

광현님은 화이트헤드 책에 그런 구절이 없다고 하셨는데.. 왜 없나요.. 있지요..
예컨대, PR 235/427 참조.. 물론 찾아보면 더 있을테지만...
화이트헤드는 현실태란 구체적 통일성으로 향해 가는 합생의 과정에 있어서
주체적 통일성을 갖는 파악들의 총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때 ‘파악의 발생적 성장’과 ‘주체적 형식들의 통합, 제거, 결정을 수반한 파악의 성장’..
그리고 ‘연속되는 여러 위상에 있어서의 주체적 형식들의 결정’이란 표현까지
명시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언급들은 이미
주체적 형식이 여럿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서 하는 기술 아닌가요?
여기서 합생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주체적 지향인 것이죠..

물리적 느낌에서의 주체적 형식은 재연입니다.. 그것은 긍정의 느낌이기도 하니까요..
개념적 느낌에서의 주체적 형식은 가치평가입니다.. 혐오와 애착.. 부정을 수반하기도 하져..
물론 고등한 현실적 계기일수록 더욱 복합적인 파악들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위와 같은 얘기들에 대해 광현님께서는
정작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제가 되려 되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설마 합생과정 안에는 주체적 형식이 하나만 있는 것으로 이해하신 건지..
 
 

...The actuality is the totality of prehensions with subjective unity in process of concrescence into concrete unity.
There are an indefinite number of prehensions, overlapping, subdividing, and supplementary to each other. The principle, according to which a prehension can be discovered, is to take any component in the objective datum of the satisfaction; in the complex pattern of the subjective form of the satisfaction there will be a component with direct relevance to this element in the datum. then in the satisfaction, there is a prehension of this component of the objective datum with that component of the total subjective form as its subjective form.
The genetic growth of this prehension can their be traced by considering the transmission of the various elements of the datum from the actual world, and-in the case of eternal objects-their origination in the conceptual prehensions. There is then a growth of prehensions, with integrations, eliminations, and determination of subjective forms. But the determination of successive pleases of subjective forms, whereby, the integrations have the characters that they do have, depends on the unity of the subject imposing a mutual sensitivity upon the prehensions. Thus a prehension, considered genetically, can never free itself from the incurable atomicity of the actual entity to which it belongs. The selection of a subordinate prehension from the satisfaction-as described above-involves a hypothetical, propositional point of view. the fact is the satisfaction as one. There is some arbitrariness in taking a component from the datum with a component from the subjective form, and in considering them, on the ground of congruity, as forming a subordinate prehension. The justification is that the genetic process can be thereby analysed. If no such analysis of the growth of that subordinate prehension can be given, then there has been a faulty analysis of the satisfaction. This relation between the satisfaction and the genetic process is expressed in the eighth and ninth categories of explanation (cf. Part 1, Ch. 11, Sect. II).
 
 

 
 2004-07-25 06:35:10
 
 
김광현 하나의 합생에 여러 주체적 형식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제 말은 주체적 지향을 여럿으로 볼때 하나의 파악에 여러 주체적 형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김광현 인용하신 과정과 실재 부분은 꼼꼼하게 읽어보겠습니다. 
 
정강길 광현님이 말씀하신 부분은 적어도 합생 안에서 발생적 사태에서의 고찰에 주로 해당하지 만족에서의 사태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결국 그 합생과정이란 것은 하나의 종속적 파악을 택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하나의 파악에는 하나의 주체적 형식만 가능하지 여럿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김광현 주체적 형식은 파악에서 주체가 여건을 느끼는 방식인데, 여기서 '주체'는 곧 주체적 지향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체적 지향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체적 형식도 결정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요? 
 
정강길 그래서 되어가는 과정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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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0589 10-25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266 08-08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617 07-10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647 04-29
61 민중신학 대부의 아내, 박영숙 선생 별세 관리자 5356 05-21
60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민중신학은 지금도 유효” 관리자 5362 04-25
59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기독교 해방주의와 민중신학 비판 (1) 미선 6968 01-27
58 홍인식 목사 “해방신학은 행진 중” 관리자 6874 12-08
57 민중신학과 강원돈의 신학 미선이 7136 08-07
56 “민중신학, 상황신학으로 규정할 수 없어” (1) 관리자 9552 01-01
55 민중을 팔아 장사하는 민중신학자들 미선이 6585 05-11
54 [출간소식] 김명수,『큐복음서의 민중신학』(도올 김용옥 서문 | 통나무) 미선이 7002 07-07
53 故 강희남 목사의 유서…'파장' 예고 미선이 7226 06-07
52 [출간소식] 권진관 『성령과 민중』(동연) (1) 미선이 7247 05-12
51 인도에서 떠오르는 '달리트 신학' 미선이 6977 04-21
50 예수는 민중이란 것에 동의하지만…민중이 예수일까? 미선이 5722 04-08
49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에 담긴 에큐메니컬 정신 미선이 5835 03-02
48 "인민신학+민중신학=통일신학" 노정선 교수, 한국민중신학회서 주장 미선이 8508 05-26
47 권진관 교수의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이해에 대한 비평 (1) 정강길 8327 04-20
46 새로운 민중신학의 이름, <살림신학> (3) 정강길 7721 01-20
45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및 학술제를 다녀와서.. (1) 정강길 9406 10-16
44 부르조아의 하나님 : 낙타와 바늘귀, 자본주의, 제국주의 (2) 리옌화 8299 07-14
43 [펌] 깨달음의 사회화 (박재순) 정강길 8421 04-09
42 "손해보고 살자" (광주 연합예배) (6) 정강길 8865 09-11
41 "가장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하나님 나라" 정강길 7203 04-01
40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정강길 7794 03-09
39 학문은 쉬워야 함에도 요구되는 '불가피한 아카데믹함'이란? 관리자 14139 02-22
38 혀짤리고 귀먹고 화상당한 우리의 늙으신 하나님을 아시나요? (최형묵) 정강길 9113 02-01
37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송기득 교수 (정용섭) 정강길 8499 01-30
36 이론과 실천의 함수관계 (* 신학과 삶의 관계) 정강길 7726 12-16
3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후기 (2) 해조 8159 12-11
34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705 12-01
33 한국 기독교 신학의 전개과정과 새로운 전환의 신학 정강길 6395 11-14
32 정강길의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을 읽고 나서 (Dong-Sik Park) (2) 관리자 9176 10-27
31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0589 10-25
30 <백두근본주의>에 대한 고찰 정강길 7381 10-25
29 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하여~!! 정강길 7404 10-18
28 한국 민중신학자 대회를 다녀와서.. 정강길 6857 09-21
27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7) 정강길 7134 09-02
26 [펌] 내 신앙의 근본을 뒤흔든 그 말, 민중신학 (정병진) 정강길 7134 09-02
25 책을 읽고.. (김광현) 관리자 6496 09-02
24    이하 광현님과 토론글 모음.. 관리자 6954 09-02
23 민중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과정철학적 관점에서 (장왕식 교수) 관리자 7620 09-02
22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5)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③ 정강길 7612 08-14
21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4)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② 정강길 7011 08-14
20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3)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 <만무>滿無 full naug… 정강길 7668 08-14
19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2) - '영성수련'이란 <공부>工夫, Kung-Fu를 말한다! 정강길 7870 08-14
18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1) -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정강길 11961 08-14
17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266 08-08
16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617 07-10
1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정강길 6770 07-10
14 민중신학과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정강길 7384 06-17
13 '민중신학연구소' 진영과의 민중론 논쟁글 모음 정강길 7444 05-20
12 ‘다른 관심ㆍ다른 이론적 틀’ 로 논의 "현재 민중신학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 (1) 구굿닷컴 7834 05-06
11 [쟁점] 비평 - 맑스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기독교 (11) 정강길 8678 05-06
10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068 05-06
9 기존 민중신학이 안티를 걸었던 <서구신학>에 대한 의미 정강길 7172 05-01
8 서남동 신학,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8887 04-30
7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647 04-29
6 서남동, 화이트헤드를 만나다.. (5) 정강길 8097 04-28
5 민중사건 그리고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7300 04-28
4 화이트헤드에 기반한 사회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 대하여.. 정강길 7693 04-28
3 민중신학이여.. 제발! 제발! 제발! 미선이 7863 04-28
2 [탈/향 강좌]민중신학 vs. 민중신학, 성서를 읽는 천 개의 눈 (1) 정나진 14956 04-27
1 21세기에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표류할 것인가..!! 미선이 16729 04-21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