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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9-02 19:19 조회(7259)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1/34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  정강길 
   
 
 
알다시피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의 인간론은 크게 인간을 둘로 나눠서 본다..
<일반인>(혹은 ‘보편적 민중’)과 <자각인>이 바로 그것이다..
(크게는 '우선적 민중' 역시 일반인에 속하니까.. )

적어도 일반인은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는 존재 일반으로서의 중생을
인간에 한정시켜 본 것으로 이들은 <내적 일그러짐>을 가지고 있는 보편인에 해당한다..
내적 일그러짐이란 쉽게 말해 나의 욕심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내적 일그러짐을 제어하지 못한 기제를 가진 일반인은
그 자신의 욕구가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힌 채로 사회에 발현되는 삶을 사는 셈이다..

우리는 매순간 세계에 대해 <욕망 혹은 욕구>appetite를 발현시키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욕구가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일종의 죽음이다.. 우리는
매순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어떤 판단을 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욕구에 의한 판단은 아무렇게나 쓰여져서는 곤란하다..
일반인은 욕구발현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가치에 둔다..
세상을 좁게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욕구발현은
늘상 자신의 생활을 위한 판단에 한정되기 쉽상인 것이다..

반면에 자각인은 우리가 매순간 맞닥뜨리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서
가장 최선으로 쫓을 수 있는 선택지를 쫓으려 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결정적으로 세계 안에 속하지 않은 <신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기독교적으로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이상향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자각인은 그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서
자신의 매순간적인 욕구발현들을 아무렇게나 판단 내리지 않고..
그 하나님 나라에 비추어서 매순간을 세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합리적 판단 결정을 내리려는 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동시적으로 객관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한
내 자신이 내린 판단 결정이 정말로 가장 최선인지 아닌지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그 판단을 내린 행태의 열매로서 유추될 수밖에 없다..
또한 검증불가능 하기에 역설적으로 누군가가 옆에 있든 없든
언제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만 눈치만 보며 살게끔
우리 자신들을 부지런한 성실함으로 유도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각인은 매사에 성실성을 지닌 자들이다..

우리 모두는 일단 기본적으로 일반인에 속한다..
세계 안의 분열과 부조화에 자유롭지 못한 구제 받아야 할 중생들인 것이다..
그럴 경우 자각인이란 그 일반인들 가운데서 신적 비전을 가지고
매사에 판단결정을 내리면서 생활하는 자들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둘 것은
한 번 자각인이 되었다고 해서 늘상 자각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각인조차도 자기 개발의 영성을 쌓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퇴행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관계적 존재이자 과정적 존재이다..
따라서 자각인조차도 그 어떤 과정상에 있을 뿐이다..
그 과정을 크게 둘로 말한다면
<발전과정(→)>이 있고, <퇴행과정(←)>이 있다..
우리에게 정지 되거나 고정된 것이란 없다..

만일 자신이 어느 순간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발전과정(→)>과 <퇴행과정(←)> 둘 중 하나에 있을 뿐이다..
존재를 그 어떤 고정된 실체로만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습성은 버리길 바란다..

발전과정(→)의 동력은 역시 신적 비전인 하나님 나라로 인해 추동된다..
즉, 이상이 현실을 이끄는 동력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자각인은 그 신적 비전을 항상 잃어버려선 곤란하다..
그것은 언제나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게끔 추동할 뿐더러
자신의 내적 일그러짐을 제어하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

그런데 자각인도 자기 개발의 과정상에 있지 않는 한
퇴행과정(←)으로 빠질 수도 있다..
퇴행과정으로 가장 빠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예수께서 광야에서 받았다는 그 세 가지 시험의 경우다..

그 세 가지 시험은 평생토록 자각인을 엄습한다..
생존, 명예, 권력 등등(남자의 경우 -여자에 대한 시험-까지)
그럴 경우 예전에 깨달았다는 자각인조차도
이 시험에 말려들 경우에 결국은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올 수 있다..
즉,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조차도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
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한때 민중운동을 했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지 말하는 법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결국 그 자신의 내적 신념 안에서조차
발전과정(→)과 퇴행과정(←)이라는 이 둘을
끊임없이 체험할 수 있기에
한시라도 하나님의 법도를 잊어선 안되며, 이를 붙잡고
그럼으로써 퇴행과정이 아닌 발전과정을 부지런히 밟을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의 진보란 <자각된 열망>이 <맹목적 충동>을
압도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
 
 
 
일반인과 자각인의 차이는 <욕구>appetite의 레벨로서도 나눠볼 수 있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한 <이성>reason의 기능과도 관련된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이성은 전통 철학이 말하는 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이성 역시 욕구 중의 하나로 보았다..(FR)

이때 욕구에도 위계가 있다는 것이다..
1차적인 욕구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꼴리면 하고 싶고 가지고 싶으면 소유하고 싶은
가장 단순한 욕구가 있다.. 이는 저등한 형태의 욕구인 것이다..

이에 비해 2차적 욕구는 적어도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관련성을 고려한 2차적 욕구가 있다..
이것은 적어도 1차적 욕구보다는 더 고등한 차원의 욕구이다..

즉, 이것은 앞서의 1차적 욕구들을 치리하는 2차적 욕구인데..
이것을 가리켜 화이트헤드는 이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성을 "욕구 중의 욕구"라고 보았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말하길,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간헐적으로만 이성적일 뿐이며,
단지 이성적인 책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 이성이 정말로 제대로 된 이성이라면
그것은 나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고려한 것이기에
세계 안에 삶의 증진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을
삶의 증진을 가져다주는 기술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욕구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합리적 판단을 꿰뚫는다..
이런 점에서 자각인의 욕구는 고위적 욕구요, 고등한 욕망인 것이다..

물론 자신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틀릴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곧
삶의 증진이 아닌 오류와 비극으로서 드러날 것이다..

즉, 자신의 이성이 정말로 이성적인지 아닌지는 아까 앞에서 말한
검증불가능의 영역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자신에게는
끊임없는 부지런한 앎의 자세 또한 요구될 수밖에 없는 사태와 직면케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성적 판단의 실패와 성공 여부는
자신에게 확보되는 정보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해 체계적으로 많이 알면 아는 사람일수록
그 판단결정에 대한 실패적 오차는 적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는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나를 포함한 세계>를 안다는 것은
서로 이분되지 않고 비례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자각인은 매사의 결정에 있어 끊임없는 합리적 판단을 쫓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욕구들은 올바로 실현되고 제어된다..
그리고 그 합리적 판단은
언제나 나를 포함한 전체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고려된 <하나님 나라>라는 신적 비전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의사판단의 결정에 매순간 임하고 계신
하나님의 계시이자 부르심인 것이다..

영성수련이란 것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길을 걸어갈 때나 누구를 만나거나 물건을 살 때나
심지어 혼자서 화장실에서 똥을 눌 때조차도 늘상 우리에게는
필요할 수밖에 없고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분 일초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욕구를 발현시키며 살아가고 있고
판단결정을 내리면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이기에..!!
 

 2004-10-08 16:24:24 
 
 
 
예수사람 (06-09-05 09:33)
 
매사의 결정에 있어 끊임없는 합리적 판단, <하나님 나라>라는 신적 비전을 따라야한다고 할 때, 이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으며...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오류를 통한 영성수련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마도 그 비결일 것입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 오늘 본문 19,20절이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모두 같이 부르십시오. 그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묘사입니다. 찬양과 기도와 감사가 바로 성령을 가득하게 받은 사람의 삶이고, 거꾸로 성령을 가득하게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가 언급되었습니다. 첫째, 믿는 사람들이 함께 찬송가를 불러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진정한 일치가 여기서 경험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신뢰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을 담고 있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바로 성령 사건이며, 생명 사건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예배는 단순히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삶 전체를 관통해야 합니다. 가정, 학교, 노동 현장, 투병의 현장 등등, 우리의 일상이 바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령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이런 예배의 신비가 여러분의 일상에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정용섭 목사)

예수사람 (06-09-05 09:38)
 
예수마실 모임에서 찬양을 인도하시는 분...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성경공부까지도 찬양과 감사 속에서 이루어지기 원합니다.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신뢰를 맛보는 흡족한 모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사람 (06-09-05 09:41)
 
신적 합리성은 주님의 뜻과 내용적으로는 같은 것일텐데... ...찬양하는 행위가 주의 뜻을 아는 지혜의 길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적 합리성에 해당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찬양과 감사는 삶의 증진을 가져오므로... ...

예수사람 (06-09-05 09:45)
 
세계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찬양과 감사가 없다면...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강길 (06-09-05 13:24)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서 깊이 느끼는 자각인의 <자발적인 우러나옴>에서 나오는 거라고 봅니다..

행여 두란노 경배와 찬양을 원하신다면야 몰라도..

적어도 예수마실교회는 기존의 온누리 교회식의 그런 경배와 찬양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싶네여..

예수사람 (06-09-05 13:31)
 
두란노 경배와 찬양을 잘 모릅니다.
다만, 찬양과 감사 시간은 논리적인 말을 넘어 노래와 시이므로 성경공부와는 감격이 남다르다는 것이지요.
지난 주 달팽이 라는 제목의 노래는 종교적 가사가 아니면서...투쟁적이지 않고...오히려 생태적 삶에 가까운 노래였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로 통합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절대자와 그리고 이웃과 함께... ...

그리고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의 역사를 삶 속에서 깊이 느끼는 자각인의 <자발적인 우러나옴>에서 나오는 거라고 봅니다.. '
역으로, 찬양과 감사의 노래부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뜻)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에베소서)

정강길 (06-09-05 13:43)
 
그니까 저로선 가사의 문제가 크다고 보는 거죠..
찬양의 형식이야 시든 랩이든 록이든 아니면 그냥 생으로 부르든 뭐든 간에 다양할수록 좋고 괜찮다고 봅니다..
정작 중요한 건 전달하는 그 가사내용 즉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내용이 관건인 거죠..
비교 체험을 위해서라면, 두란노 경배와 찬양을 한 번 알아보셔도 좋은 경험일 듯 싶습니다..

글구 윗글 본문은 찬양과 감사에 대한 직접적 글은 아니기에
찬양과 감사에 대한 논의는 따로 글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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