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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권진관 교수의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이해에 대한 비평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4-20 05:10 조회(8327)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1/101 
  FILE #1 : 권진관-정강길글논평.hwp (20.0K), Down:17, 2008-04-20 15:33:23
  FILE #2 : 류장현-이정희글논평.hwp (44.5K), Down:4, 2008-04-20 15:33:23
  FILE #3 : 권진관-민중은_누구인가-발표용.hwp (78.0K), Down:10, 2008-04-30 21:36:33




요즘 나 자신이 기존 민중신학 진영에 대해선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긴 한데
그 이유는 말을 뱉어내자면 나는 기존 민중신학 진영을 생각할때마다 종종 열불을 느끼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존 민중신학 진영은 1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그 좋은 자산을 잘 살려내지도 못하면서
종종 했던 얘기들이 지겹게 물리도록 또 나오고 또 나오고 있는 실정이라 참으로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기존 민중신학자들이 논의하는 그 지겨운 레퍼토리란
민중신학에서 민중은 도대체 누구이며, 민중은 과연 역사의 주체인가 혹은 
민중은 과연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얘기들 등등을 일컫는다.
 
이런 얘기들은 내가 알기에 거의 15년 전에도 민중신학회 논의에서 종종 들어왔었던 얘기였는데
아직도 기존 민중신학 진영에선 계속 이런 얘기가 나온다니.. 
기존 민중신학이 이런 낮은 수준의 논의에 머물고 있다는 게 너무나 한심할 따름이다.
 
특히 민중신학을 한다는 대학 교수님들은 좋은 대학 여건의 환경에서도
어찌 그것밖에 되지 않는지에 대해 너무나 참담할 따름이다.
내가 지금 너무나 심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솔직히 한국 민중신학을 살려내겠다고 하는 자들이 실상은
자꾸만 좋은 유산의 한국 민중신학을 온전하게 계승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자꾸만 한국 민중신학의 자산과 명맥을 죽이고 있다고 보기에 하는 얘기일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한국 민중신학회에 가질 않는다.
특히 목회자들이나 젊은 사람들도 거의 관심이 없거나 참여하질 않는다고 들었다.
나는 이미 대학교수님들이 대학의 그 좋은 여건과 혜택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삶의 현장이란 것을 잘 들여다볼 줄을 모른다고만 판단된다.
 
그런데 그저께 한국민중신학회가 모여서 발표를 했나보다.
듣자하니 아주 가끔이라도 종종 하긴 하나보다.
거길 다녀온 후배녀석의 말을 들으니 몇 명 안되는 적은 인원인 가운데
거의가 연로하신 교수님들이 주로 함께 모인다고 한다.
 
마침 그날 발표자가 성공회대학교의 권진관 교수였고,
발표 주제는 "민중은 누구인가?" 에 대해서 발표하였단다.
 
권진관 교수는 내가 알기에 한국민중신학회의 오랜 실세이기도 하다.
이분은 한국 민중신학의 명맥을 잇겠다는 그 마음만큼은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분이 언급하는 민중신학 논의가 솔직히 너무나 나이브해서 참으로 안습이 아닐 수 없다.
 
근래에는 화이트헤드를 민중신학에 적용한다면서 종종 언급하기기도 하는데
전에도 그랬었지만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정확하거나
혹은 내가 보기엔 오도된 적용들을 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다.
 
권진관 교수는 이번 '민중은 누구인가'라는 발제문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의 주체subject와 초주체superject를 언급하면서 민중도 마찬가지다라면서 적용한다(발제문3쪽).
 
그런데 이런 얘긴 하나마나 한 얘기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 철학의 주체와 초주체 개념은 민중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이미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존재론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지평에서 볼 때 모든 존재들에게 적용되는 개념을
뭣땀시 민중에게만 특별한 것처럼 해당되는 것인양 소개하는지를 모르겠다.
민중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이미 주체이자 초주체인 것이다.
 
전에도 그랬었지만 이분은 화이트헤드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게 잡혀있지 못하다.
언젠가 나의 민중론을 읽고서 논평이라면서 칸트를 언급하는 황당한 우를 범했을 정도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은 칸트 인식론의 역전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내가 백두를 완전 거꾸로 이해하고 있던가 아니면
권진관 교수가 백두를 완전 거꾸로 이해하고 있던가 둘 중 하나일 것이리라.
 
그리고 권진관 교수는 말하길,
예수는 성령으로 민중과 함께 하므로 민중의 운명은 예수와 성령의 운명과 연결되며,
민중의 삶은 성령과 예수의 기능과 연결된다고 말한다(발제문5쪽).
그런데 이것은 민중에 대한 지나친 낙관일 수밖에 없다.
민중도 이미 인간적일수 있는데 어떻게 이것이 자동으로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민중이라고 해서 죄다 성령을 잘도 받아들이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또한 그는 민중이 다중(multitude)에 가깝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에서 말한 다중을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의 경우 그 다중은 궁극적으로 들뢰즈 철학에 기반해 있다.
이것은 거의 유물론 진영에 해당하며, 결국은 신학적 개념으로선 미흡한 것이라 여겨진다.
(*참고로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진영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들뢰즈 가타리 사상을 수용하는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는데, 네그리와 하트는 바로 그 후자에 속한다)
 
이는 권진관 교수가 개념을 선택함에 있어
적어도 형이상학적 문제의식이나 철학적 문제에 있어선
적어도 잘 모르고 있다던가 또는 신중하지 않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들뢰즈 사상에 기저한 민중신학 적용은 이미 오래전에도 이정희 선생을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라 그다지 새로운 것도 못된다.
  
오래전에 기존 민중신학회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론을 발표한 적도 있긴 했었다.
그래봐야 당시 발표시간도 고작 20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의 논평자였던 권진관 교수의 글은 정말이지 최악의 날림 논평이었다.
당시에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평가가 아니었다. 그럴만도 한 게 같은 날
다른 논평자로 나왔었던 류장현 교수의 성의 있는 논평과도 극명하게 비교 되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 혹시 궁금한 사람들은 당시 두 사람의 논평 전문을 올려놓을테니 직접 비교해보시길 바란다.)
 
글을 제대로 이해도 못하고서 어찌 이를 논평이랍시며 쓸 수 있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냥 성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리듯이 쓴 글이 아닐까 싶다.
 
그 사건 이후에 나는 기존 민중신학 진영이 의도적으로 나를 배제하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을 거론하자니
이미 기존 민중신학 전체가 비판되고 있는 것이기에 그 한계와 치부를 드러내는 것밖에 안되고
결국은 기존 민중신학자들의 직무 유기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기존 민중신학의 정통 계승을 자처한다는 헤게모니 싸움에 별로 끼고 싶지도 않기에
이후론 거의 한국민중신학회에 별로 가고픈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정녕 학자들이란 게 그런 것인가. 가끔 뜻하지 않게 참석해서 들어보면 여전히 역시나 였다.
 
아래의 글은 그때 2004년 5월에 있었던 권진관 교수의 바로 그 날림 논평 전문과
그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 나 자신의 반론이다.
지금도 꼼꼼히 읽어보면 나름대로 재밌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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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2 02:21
 
 
솔직히 논평이라면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글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서 비판적으로 독해를 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권진관 교수의 논평은 나 자신이 그때 논의에서도 응답을 하였지만
이런 점에서 매우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

(*궁극적으로 나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밑에 올려놓은, 그때 같은 자리에서 이정희 선생님을 논평하셨던
류장현 선생님의 성의어린 논평과 직접 비교를 해보길 바란다..
나로서는 권진관 교수의 겨우 A4 한 장 남짓한 이번 글을 최악의 논평의 전형으로 삼고자 한다..)

아무튼 이번에 권진관 교수의 논평이 나의 논지를 제대로 먼저
이해를 하고서 썼다고는 볼 수 없었고 또한 그 자리에서 나는 그렇게 아래와 같이 응답을 드렸었다..
물론 나의 이 같은 응답에 하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재응답을 남겨도 좋다고 하겠다..

(* 참고로 이번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 발제는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이하 줄여서 ‘화새민’]의
제8장(p.151-184)과 거의 동일한 것이다.. 어느 것을 참조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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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강길은 민중을 3-4개로 나눈다. 보편적 민중 (인류), 우선적 민중, 정황적 우선적 민중, 자각된 민중 (자각인). 구원은 자각인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자각된 민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각인은 양심적이면서 세상을 꿰뚫어 보는 (특히 화이트헤드를 이해할 줄 아는) 지식인인 것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구원이 자각인으로부터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쓰고 있다(발제문 6-7/화새민 160-163). 또한 나의 발제 어디에서도 자각인을 지식인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전태일이 지식인이었던가? 김해성 목사가 지식인이었던가? 이미 인간 자체는 다차원적 계급의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각인은 단지 그 사람이 어느 사회적 위치에 있든지 간에 모든 가능성에서 나타날 수 있을 따름이다..
 
 
 
 
 
2. 민중은 자각인들에 의해 인도되야 하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중은 저급한 욕구를 충족하려고 있고 죄에 빠져있다. (그러나 그렇게 저급하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닌가? 예, 의식주 등등) 따라서 자각인들은 이러한 무지하고 바보스러운 민중을 인도 개화해야 한다. “내적 일그러짐” == 남을 해할 수 있는 횡포,수탈로 나타난다.

-인도, 개화라는 표현보다. 자각인이 깨달은 도의 전달(전도, 傳道)이나 설득이라는 표현이 더 타당할 것이다.. 저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인간 욕구에 레벨이 있다는 얘기다..(‘화새민’ 250. 참조) 예컨대,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고, 하고 싶으면 하는 식으로 곧바로 배설해내는 1차적 욕망이 있다.. 이보다 더 높은 것은 아무리 자신에게 그러한 욕구가 있더라도 세계를 합리적으로 고려한 이후의 욕구가 있다.. 이것은 앞의 욕구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 욕구는 앞의 단순 욕구들을 치리하는 2차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각인의 목적은 우선적 민중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데에 있다..
 
 
 
 
 
3. 그의 민중론은 인간론이다. 인간론은 보편성을 강조한 것인데, 민중신학은 당연히 보편적인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고 만다.

-나의 논지에서는 보편성과 당파성을 둘 다 얘기하고 있다.. 왜 한 쪽만 언급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절반이상을 우선성(당파성)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잖은가.. 단지 그 출발이 인간론에서 시작할 뿐이다. 왜냐면 민중 역시 인간이니까..

당파성 없는 보편성은 민중신학이 그동안 수차례 얘기해왔던 거짓보편성이요.. 보편성 없는 당파성이란 제한된 특수성이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 글에서 이 둘 중 어느 한 쪽만 얘기하는 것은 누누이 반대하고 있다(화새민 206-208). 또한 나의 민중론에서 우선적 민중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민중신학’이라고조차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나는 '우선성(당파성)의 원리'를 말하면서 이것 없는 예배든 신학이든 교회든 뭐든 간에 그것은 한낱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며, <거짓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못박고 있잖은가..(화새민 207-208)
 
 
 
 
 
4. 자각인은 심원한 깨달음, 자기를 버리는 존재 등. 영적, 지적 엘르뜨인가? 혹은 자각된 민중인가 불확실. 157 쪽. 자각인은 자신의 나약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그리하여 창조적인 전진을 하는 사람.

-당연히 지적 엘리뜨가 아니라 자각된 민중이다.. 권진관 교수가 지적한 p.157을 눈씻고 들여다봐도 지적 엘리뜨란 용어는 없다.. 왜 내가 쓰지도 않았던 용어를 끼워넣는 것인가.. 나는 자각인이 그리스도적 에고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적 실존이다..
(*참고로 여기서의 그리스도적 실존이란 과정신학자 존 캅이 말한 “하나님의 영안에서의 실존”과도 유사하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영안에서의 실존’이란 하나님의 창조적-응답적 사랑에 자신을 개방하고, 자기 이기심이나 죄의식, 개인주의가 극복되어 타인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개방성과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5. 구원의 내면화 혹은 정신화. 즉 무지로부터의 해방. 자각인으로의 거듭남. 이로써 의로운 삶을 사는 것. 구원의 지속을 위해서 영성수련이 필요하게 된다.

-구원은 전인적이다.. 내면화라니? 내적 성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인간 자체가 관계적 사회적 존재이기에 그 사람이 변하면 그와 관계된 사회 역시 변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고독한 종교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권력적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따름이다..
나의 민중신학에서는 개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단순히 ‘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세계 안에서의 나’이기에 타자와 자신을 함께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다..(화새민 231-232.)
 
 
 
 
 
6. 전형적인 인식자, 구원자, 능동자로서의 자각인과 도움을 받아야 할 피동적인 민중이라고 하는 이분론. 데카르트적 주객의 이분법? 혹은 칸트적인 thing in itself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thing in itself 와 같은 신비적인 영역을 철저히 조명해 들어가는 철학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서 이러한 신비적 영역을 극복해 나가는 추세가 명백하게 있다. 동시에 주관주의적 관념주의적 담론의 색채가 매우 강하다. 예를 들어, 정황적 민중은 자각자의 눈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칸트적인 주관주의, 관념주의이다. 오늘날에는 탈주관주의가 요청된다. 특히 체제와 제도에서 비롯되는 권력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개인, 주체가 뒤로 물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관념주의 보다는 보다 객관주의, 비주관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특별히 데카르트적인 주객의 관념주의는 민중을 조작, 통제, 억압하는 구조를 갖는다. 정강길의 체계에서는 민중이 숨쉬고 땀흘리고 투쟁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전연 보이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될 뿐이다. 민중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데, 민중신학은 민중을 분석하기에 앞서 그들의 주체적인 이야기, 열망, 관심, 주체성을 강조한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정강길은 지식인의 주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권진관 교수의 논평 중에서 나의 논지를 가장 괴상하게 이해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갑자기 칸트가 왜 튀어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권진관 교수는 나름대로 화이트헤드를 안다고 하는데, 그가 정말 화이트헤드의 <개정된 주관주의적 원리>Reformed Subjectivist Principle)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리라..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의 인식론은 칸트의 그것과 그 도식이 전혀 반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관념주의가 아니라 실재론자다.. 내가 발제문에서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real preferential-minjung 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민중이 실재한다는 얘기지 무슨 주관적 관념에서 머물고만 만다는 것이 아니었잖은가.. 데카르트 얘기는 더욱 황당하다..

분석 자체가 해석일진대 지금까지 민중신학이 민중사건과 민중의 이야기에 관심하면서 이를 한번도 분석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게다가 지식인의 주관성은 또 무엇인가??? 예컨대, 특수 질환을 앓는 자각인이 있을 경우 그는 그 자신의 삶에서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그 특수 질환의 환자들이 그 자신의 우선적 민중일 확률이 높다..(발제문 12-13.) 그런데 여기서 지식인의 주관성이 왜 갑자기 튀어나오는가??

아마도 권진관 교수가 지식인을 자꾸 얘기하는 것은 나의 논지에서 여러 사회과학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이유를 말한 것을 두고서 지적한 얘기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필요한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실재적 우선적 민중을 더더욱 밝히 알고 또한 이를 위한 실천적 투쟁의 효율성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잖은가..(발제문 11-12).
아무리 못나고 못배운 민중이라도 그럴수록 민중교육의 문제는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나 자신은 공부를 영성수련이라고까지 말한다.. (화새민 p.248-260). 민중이라고 해서 그 공부가 구구단 수준에 머물고 말아야 한단 말인가?

아무튼 그의 논평 중 이 부분은 나로서는 그가 화이트헤드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언급이며, 그가 나의 저서를 제대로 독해하진 못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참고로 권진관 교수는 나의 저서를 5-6시간 만에 다 읽을만큼 죄다 독해했었다고까지 말했었다..@.@?? )
 
 
 
 
 
7. 우선적 민중은 보편적 민중의 죄에 의해 한을 얻는다. 1세대와 민중신학 일반에서는 죄는 억압자들과 그들이 만든 체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각인들은 민중의 한을 풀어줘야 하는데, 여기에서 누구를 대항해서 한다는 데에 불분명. 보편적 민중?

-이 역시 나의 글을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다.. 나의 발제문 10, 13-14/화새민 166-167/173을 보라.. 자각인이 저항하고자 하는 대상은 그 자신의 우선적 민중과 얽혀있고 이들을 억압하고 있는 그 체제와 보편적 일반인인 것이다.. 나는 이데올로기 투쟁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고 쓰고 있다..
쉽게 예를 들면, 앞서 말한 특수질환 환자들의 경우, 이때의 자각인의 투쟁의 대상은 바로 잘못된 의료보험 체제와 그 종사자들이 우선적인 저항의 대상에 속한다고 하겠다..
자각인의 저항 대상은 언제나 그 자각인과 연대된 우선적 민중을 억압하고 있는 체제와 그 종사자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8. 단어의 문제: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preferential을 그대로 민중에게 쓰는 것은 문제?

- 나는 나의 글에서 <보편적 민중>, <자각된 민중>, <우선적 민중>을 각각 <일반인>, <자각인>, <민중>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 자신이 기존의 민중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우선적 민중>이라고 쓸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었다..(발제문 1/화새민 32, 152) 또한 <우선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고통의 절박성에 있는 사람일수록 우선적임을 말해주고 싶었기에 썼다고 했다..(발제문 9/화새민 165-166)
 
 
 
 
9. 전반적으로 비정치적이며, 비역사적이다. 정치와 권력의 현실에 대해서 천착이 없다. 메셀 푸코 등 참조해야 할 것. 반면에, 매우 보편론이고, 형이상학적, 비역동적 담론구조를 가지고 있다. 민중신학은 철저하게 정치적, 역사적, 역동적인 담론을 창조하려고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도리어 되묻고 싶다.. 도대체 나의 글 어느 부분이 구체적으로 그러한지를 말이다.. 그렇게 지적해주었으면 좋겠건만 그의 논평에서는 근거는 없으며, 막연하고 개연적인 억측만 있잖은가.. 분명하게 지적해달라..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점이 그러한지를..

(푸코? 푸코 자신의 주장은 권력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푸코의 이성은 권력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단 말인가? 이 물음은 근대 이성이 권력에 오염됐다고 고발했던 푸코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결코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푸코에게 있어서는 가장 치명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10. 예수는 민중이 아니라, 자각인으로 된다. 여기에서 민중과 예수의 상호성이 상실된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가 아니라, 민중이다.

-만약에 예수와 오클로스(민중)를 그냥 같이 ‘민중’으로서 묶어버리면 예수고유의 변혁적 통찰은 희석되어 버린다.. 전태일이 어찌 그 당시의 노동자와 똑같다고만 볼 수 있겠는가.. 즉, 이들은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없던 전태일 고유의 것이었으며, 이로써 노동자들과 함께 해방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나의 주제는 예수와 민중 둘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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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렇게 글로써 차분하게 논쟁하는 것도 훨씬 낫다고 본다..
누구든 좋다.. 권진관 교수 자신이 나의 이 응답에 대해 다시 답변을 남겨도 좋고
혹시라도 권진관 교수의 언급에 동의하는 사람이 내 글에 반론을 남겨도 좋다..
 
비판은 괜찮지만 구체적이고도 정당한 근거 없이 또는 전체가 아닌
부분적 측면만 자의적으로 골라서 억측과 왜곡을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언어적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해주었으면 한다..
 
만일 내가 어느 정도의 나이였다면 어찌 저러한 날림 논평이 나올 수나 있었겠는가..
적어도 학문적 자리에서는 냉철하고도 동등하고 공정하게 처리해줄 것을
다시 한 번 바라는 바이다..
 

 
2004-06-02 02:21
 
 
 
관리자 (08-04-30 21:39)
 
친절하게도 권진관 교수님께서 이날 한국민중신학회 발표 원고를 파일로 보내주셔서
위에 첨부해놓았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다운받아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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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출간소식] 권진관 『성령과 민중』(동연) (1) 미선이 7248 05-12
51 인도에서 떠오르는 '달리트 신학' 미선이 6977 04-21
50 예수는 민중이란 것에 동의하지만…민중이 예수일까? 미선이 5722 04-08
49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에 담긴 에큐메니컬 정신 미선이 5835 03-02
48 "인민신학+민중신학=통일신학" 노정선 교수, 한국민중신학회서 주장 미선이 8509 05-26
47 권진관 교수의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이해에 대한 비평 (1) 정강길 8328 04-20
46 새로운 민중신학의 이름, <살림신학> (3) 정강길 7722 01-20
45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및 학술제를 다녀와서.. (1) 정강길 9406 10-16
44 부르조아의 하나님 : 낙타와 바늘귀, 자본주의, 제국주의 (2) 리옌화 8299 07-14
43 [펌] 깨달음의 사회화 (박재순) 정강길 8422 04-09
42 "손해보고 살자" (광주 연합예배) (6) 정강길 8865 09-11
41 "가장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하나님 나라" 정강길 7203 04-01
40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정강길 7794 03-09
39 학문은 쉬워야 함에도 요구되는 '불가피한 아카데믹함'이란? 관리자 14140 02-22
38 혀짤리고 귀먹고 화상당한 우리의 늙으신 하나님을 아시나요? (최형묵) 정강길 9113 02-01
37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송기득 교수 (정용섭) 정강길 8500 01-30
36 이론과 실천의 함수관계 (* 신학과 삶의 관계) 정강길 7726 12-16
3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후기 (2) 해조 8159 12-11
34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706 12-01
33 한국 기독교 신학의 전개과정과 새로운 전환의 신학 정강길 6396 11-14
32 정강길의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을 읽고 나서 (Dong-Sik Park) (2) 관리자 9176 10-27
31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0589 10-25
30 <백두근본주의>에 대한 고찰 정강길 7382 10-25
29 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하여~!! 정강길 7404 10-18
28 한국 민중신학자 대회를 다녀와서.. 정강길 6857 09-21
27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7) 정강길 7135 09-02
26 [펌] 내 신앙의 근본을 뒤흔든 그 말, 민중신학 (정병진) 정강길 7135 09-02
25 책을 읽고.. (김광현) 관리자 6496 09-02
24    이하 광현님과 토론글 모음.. 관리자 6954 09-02
23 민중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과정철학적 관점에서 (장왕식 교수) 관리자 7620 09-02
22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5)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③ 정강길 7612 08-14
21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4)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② 정강길 7011 08-14
20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3)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 <만무>滿無 full naug… 정강길 7668 08-14
19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2) - '영성수련'이란 <공부>工夫, Kung-Fu를 말한다! 정강길 7870 08-14
18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1) -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정강길 11961 08-14
17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266 08-08
16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617 07-10
1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정강길 6771 07-10
14 민중신학과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정강길 7385 06-17
13 '민중신학연구소' 진영과의 민중론 논쟁글 모음 정강길 7445 05-20
12 ‘다른 관심ㆍ다른 이론적 틀’ 로 논의 "현재 민중신학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 (1) 구굿닷컴 7835 05-06
11 [쟁점] 비평 - 맑스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기독교 (11) 정강길 8678 05-06
10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068 05-06
9 기존 민중신학이 안티를 걸었던 <서구신학>에 대한 의미 정강길 7172 05-01
8 서남동 신학,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8888 04-30
7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647 04-29
6 서남동, 화이트헤드를 만나다.. (5) 정강길 8097 04-28
5 민중사건 그리고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7300 04-28
4 화이트헤드에 기반한 사회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 대하여.. 정강길 7693 04-28
3 민중신학이여.. 제발! 제발! 제발! 미선이 7864 04-28
2 [탈/향 강좌]민중신학 vs. 민중신학, 성서를 읽는 천 개의 눈 (1) 정나진 14956 04-27
1 21세기에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표류할 것인가..!! 미선이 16729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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