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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손해보고 살자" (광주 연합예배)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9-11 22:23 조회(9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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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보고 살자"    
그리스도인의 삶, 손해보는 삶의 세 가지 단계 (마가복음 10:17~22)
 

정강길

 
 
마가복음 10:17~22

17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19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20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저는 오늘의 말씀 제목을 “손해보고 살자”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정말로 손해보고 살고 싶을까요? 그런 사람이 정말 몇이나 있을까요? 아마도 오늘날에 이런 얘길 하면, 어떤 이에게는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미친놈이 아닌 이상 도대체 각박한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손해보고 살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들 경제가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 시대에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가장 비경제적으로 사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냐는 거죠.

그런데 성서를 가만히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는 삶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비경제적인 삶인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생판 모르는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부러 자신의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퍼주고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는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손해 보는 삶에 있어서도 세 가지 등급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손해보는 삶의 첫 단계 -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가장 첫 번째가 “까짓것 내가 좀 손해 보지”의 단계입니다. 어떤 사람이 겨우 취직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첫 출근을 합니다. 그래서 바쁘게 집밖을 나서는데 마침 어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리어카에 큰 짐을 싣고서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언덕길이라 고생을 합니다. 이 모습을 목격한 이 사람은 도와드리고 싶지만 출근 시간이 좀 빡빡하기 때문에 자기가 도와드리면 분명하게 회사에 지각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취직되자마자 첫 출근부터 지각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분명하게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민을 합니다. 그런 뒤에 나지막히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습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마음이 바다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으로 은혜스런 말입니다.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사실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상황은 실제로 종종 맞닥뜨립니다. 주변사람들을 위해, 자기보다 못한 남을 위해 조금만 더 시간을 내고 자기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더 힘을 보태는 경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형제자매님들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만큼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까짓것 손해 좀 보며 어때, 손해 보고 살지.” 이것이 바로 손해보고 사는 삶의 단계 중에서 가장 첫 번째 단계입니다.

손해보는 삶의 두번째 단계 - "주를 위해 죽기까지 손해보라!"

두 번째 단계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까짓것 손해 보고 살지”라는 그러한 삶이라면,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손해를 봐야 할 것인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손해를 봐야 할까요? 성경은 뭐라고 하고 있나요?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죽기까지 손해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죽기까지 충성하라.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르라.

유명한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날 위해서 너희가 죽어달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 나 믿어?” “그래? 그럼 좀 죽어줘!” “걍 좀 죽어줘야겠어!”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하나님 말씀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난 살고 싶은데 죽어달라니. 하지만 어쩌겠어요. 너희가 죽기까지 손해 보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손해 보는 삶의 단계에 있어서 첫 번째 보다 높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물론 이것은 곧바로 죽어달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들의 생애 전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향기를 발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서,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에 있다고 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에게는 각자가 받은 달란트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각자의 삶의 현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삶의 현장들에서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바대로, 그리스도적 가치를 위해 너희가 죽기까지 손해보고 살라는 얘기일 것입니다.

혹시 예수는 믿고 싶은데 죽기까지 손해보고 살긴 싫으시다구요? 아직은 내키지 않으시다구요? 그런데 어쩌렵니까? 성경은 결국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사실 그래서 제가 좀 전에, 첫 번째 단계인 “까짓것 내가 좀 손해 보고 살지!” 그 정도 단계만이라도 최소한 실천이 된다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가 있는데 이 사람은 그의 글에서 “인생을 의자뺏기 게임”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의자뺏기 게임이 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은 열 명인데 의자는 아홉 개가 있는 경우, 필연적으로 한 명은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서로 의자에 앉으려고 하는 그러한 게임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그냥 의자를 다른 사람이 앉도록 해주라”는 것입니다. “너가 좀 잃어주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의자뺏기 게임과도 같습니다. 누구하나는 꼭 손해를 봐야 합니다. 누구하나는 꼭 잃어야 합니다. 결국 누구 하나가 손해를 봄으로써 그나마 세상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남들 다 앉으려고 하는 그 의자를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의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손해를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손해보는 삶의 세 번째 최고의 단계 -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기!"

자, 이제 손해 보는 삶의 단계에 있어서 가장 높은 세 번째 등급의 단계가 남아 있습니다. “와아, 죽기까지 손해 봤으면 됐지 또 도대체 뭐가 남아 있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높은 그 세 번째 단계란 바로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는 단계> 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할 때, “내가 정말 내 시간과 내 노력과 내 삶을 주면서까지 손해를 보는 것이지만 어차피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뭐 그런 생각 하셨던가요? 내가 이들을 위해 죽기까지 나의 목숨은 손해 보는 것이지만 기꺼이 하겠다”라는 뭐 그런 생각하셨을까요? 전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그렇게 사신 겁니다. 그냥 유유히 사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머리 속에는 ‘나는 이들을 위해 내 삶을 투신한다’라는 생각이나, 혹은 어떤 면에서 ‘나는 이들을 사랑하고 있다’라는 그런 생각조차도 없어요.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그 자체가 그 분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 선물을 사 줄때 “에이 돈 아깝지만 내가 좀 손해를 보지만 해 준다” 뭐 그런 생각 떠올리면서 해주나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냥 뭘 해줘도 아깝다는 생각조차 안 들고, 그냥 뭘 퍼줘도 하나도 손해라는 생각조차도 안 들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맞아도 하나도 안 아픈 경험, 매우 신기하고 놀라운 경우가 우리네 일상적 경험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은 나의 자아(에고)는 전혀 없고 오직 사랑으로만 충만한 단계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사랑 그 이상의 단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앞의 두 단계보다 왜 높냐고 하면, 앞의 두 단계를 몽땅 아우르면서 넘는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는 이러한 차원을 <만무>(滿無)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득찬 무, full naught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집스런 자아는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적 에고>로서만 충만한 상태, 영성의 가장 높은 단계이죠. 사랑을 실천하고픈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럼 사랑 그 자체가 되십시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손해를 볼 것인가?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들 다하는 거 하고, 남들 다 먹는 거 먹고, 우선 나부터 우리 가족부터 우리 친구들부터 잘 먹고 잘 살아야 남을 위해 돕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본문을 잘 한 번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구하러 왔습니다. ‘랍비여,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계명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람은 “자신은 지금까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키고서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부모도 공경하고, 도둑질도 안하고 거짓말도 안하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쭈욱 살아 왔다고 터놓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보면 이 정도도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적어도 남한테 폐가 되거나 손해를 끼치고 사는 그러한 삶을 살진 않았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성경 본문에 예수께 찾아온 이 사람도 재산을 많이 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참으로 성실하고 착한 사람인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자신들도 흔히 생각하길, 자기는 적어도 남들한테 폐나 손해는 안 끼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들 가운데는 여기 영생을 구하러 왔던 바로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남한테 폐나 손해는 끼치지 않으면서 계명을 쭈욱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는 남한테 폐나 손해는 안 끼치고 살면서, 그러다가 자기도 여유가 있으면 남을 위해 베풀기도 하고, 적당히 남을 위해 살기도 하는, 혹시 그러한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진 않으신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보시고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고 말합니다. 이때 <가진 것>이라는 것 안에는 꼭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 물질만 가리키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게 속한 물질 뿐 아니라 내 몸, 내 인생, 내 미래까지 죄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속한 가장 아끼는 것을 기꺼이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을 구하는 길이요,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손해라는 생각조차도 초월해야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보는 손해보는 삶

지금까지 손해 보는 삶의 세 가지 단계를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할까요? 물론 <하나님 나라와 그 의(義)>를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모두에겐 각자 받은 달란트가 있을 것이고 각자 나름대로의 삶의 현장이 있을 것입니다. 생활반경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가능한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현장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왕따들을 위해 언제나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주십시오.

저는 이러한 사회적 왕따들을 <우선적 민중>Preferential Minjung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회적 왕따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모든 지평에서 공평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분명하게 부자들보다는 가난한 자를, 일반인보다는 왕따들을,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자들을, 남자보다는 여성들을,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더욱 우선시하셨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념을 평생토록 이어가면 될 것입니다.

김규항의 얘기처럼, “세상은 ‘학생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간직되는 신념으로 바뀌고, 그 긴 신념은 운동을 세상의 모든 지점으로 넓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운동하는 판사, 운동하는 국회의원, 운동하는 배우, 운동하는 코미디언, 운동하는 가수, 운동하는 투수, 운동하는 장군, 운동하는 사장, 운동하는 교사 등등 … 세상의 모든 지점에 이러한 운동이 스며들 때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전 생활의 영역에서부터 들풀처럼 일어나는 것이고, 정의가 강물처럼 일어나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전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설마 자신에게는 이러한 삶을 사는 게 정말 벅차고 힘드시다구요? 그래서 제가 앞서 말씀드린 “까짓것 내가 좀 손해보지” 정도만이라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최소한 해주십사 부탁드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능한 것부터, 아주 작은 것부터 함께 해보자구요. 그러면서 점점 내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면서, 나의 모든 것을, 내 인생의 목표 전체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바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손해 보는 삶인 것 같지만 결코 <그 손해가 손해가 아니었음을 깨우치는 단계>의 경지에까지 이르시길 바랍니다.

저희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나의 가장 귀한 것을 온전히 바침으로서, 다시 말해 이 땅에서 내 삶을 점점 더 크게 손해봄으로써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척박한 이 땅의 현실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손해를 보는 삶을 살아갈 때에, 놀랍게도 그와 동시에 장차 임할 저 하나님 나라에는 없어지지 않을 재화와 보물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따지고 보면 손해가 아니라 <영원한 이익>인 셈이죠. 하지만 그보다도 더! 우리가 손익을 계산하고 염려하는 그 생각과 자아마저도 아예 초월해버릴 때,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 사람에겐 벌써 임하신 거라는 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주님,
주님께선 바로 이 모든 것을 몸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어찌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부족한 저희들도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걸어가신 그 길을 걷도록 하여 주옵소서.
비록 그 길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손해보는 길로 보여질 진 몰라도
하늘 나라의 비전으로 볼 때 그 길은 결코 손해보는 길이 아님을 저희가 눈뜨게 하옵소서.
내가 약할 때마다 나의 친구이자 나의 동반자되시고 나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광주 연합예배 하늘말씀 나누기 설교전문)
 
 
 
 
미래꿈 (10-06-20 17:42)
 
아름답습니다. 06년 9월 광주연합예배때 말씀이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났네요. 어제 세기연 세미나 참석하고 이제야 홈피에 회원가입하고 둘러보고 있습니다. 교회홈피와 제가 속한 선교회 홈피로 퍼 갈께요.~

ㄴ ㅏ (11-03-29 10:07)
 
좋은 말씀이죠.. 이런 좋은 설교들 셀 수 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말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이 있으면  알고 싶은데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손해본다는 것에 있어서요..
단순히 그냥 내것을 빼앗는 것이 아닌 거짓과 탐욕과 욕망의 권력이 속여 취할 때 그때도 그대로 두어야 할까요? 예를 들자면 내가 쓴 글을 형제(형제는 이미 유명한 작가가 되었음) 가 자기가 쓴 글인 것처럼 상도 받고 돈도 번다면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손해 볼 경우 작지만 역사가 외곡 되는 것 아닌가요? 이럴 땐 손해보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손해 본다는 그 영역은 어디까지인지요?

미선이 (11-03-29 14:09)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이라도 좋은 말 옳은 말 하는 사람이라면 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는 상처와 고통 심지어 생명을 죽이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잖아요. 말의 힘이란 건 참으로 무섭지요.
성서의 하나님도 세상을 말로서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은 생명을 창조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잖아요.
예컨대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보세요. 그런 설교라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전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지도자나 혹은 정책 결정자들의 말이나 언론 매체의 말 말 말도 얼마나 무서운가요.

그렇기에 ㄴ ㅏ님께선 주변에 좋은 말이나 좋은 설교라도 셀 수 없이 들으신다고 하신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분들한테 당신은 늘 말에 머물러 있다고 굳이 책잡을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비판의 칼날은
생명을 죽이는 부당한 말, 옳지 않은 정의롭지 못한 말들을 곧잘 하는 분들한테 더욱 집중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심지어 잘못된 지식과 정보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재앙을 불러 일으키는지에 대해선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쨌든 주변에 그나마 말이라도 좋은 말 바른 말을 해주시는 분들에겐 저는 그나마 다행으로 느끼고 있답니다.

물론 ㄴ ㅏ 님의 말씀대로 궁극적으로는 말에 머물러 있어서도 곤란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손과 발을 비롯한 <몸의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런데 제 주변에 이러한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역시 아직 롤모델을 찾고 있는 지경인지라..
아직 살아 있는 분들에게서는 발견하질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무명의 보살들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로선 그저 역사적 예수의 삶 그리고 붓다나 원효나 암베드카르 혹은 마틴 루터 킹 그리고 동학의 최제우나
전태일과 문익환 목사님의 평전을 읽으며 늘 깨어있고자 노력할 따름입니다. 늘상 과정 중에 있을 뿐이죠.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해주신 질문에 대해선 이렇게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은 정의에 눈을 감는 손해를 말한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으로 봅니다.
오히려 정의를 위한 손해(희생)이라고 해야할테지요. 그렇기에 의로운 손해라고 해야 할 듯 싶군요.
그러한 손해를 죽기까지 하라는 것이며, 그 같은 손해를 손해로 알지 않는 삶이 되길 바란다고 보는 것이죠.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점 있으시면 재차 질문해주시면 성심껏 답변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ㄴ ㅏ (11-03-30 16:51)
 
책을 잡은 것은 아니고요 그동안 수년동안 누구나 처럼 좋은 말씀에 은혜받고 깨닫고 했으나 그 깨달음으로 나가고자 했을 때 길이 안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알게 된 것이죠.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듣는 사람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 문제점을 잘 못느끼고 있구나 하고요.. 어떻게 보면 행동해야 하는 것을 모른다거나 서로 행동할 용기나 마음이 없어서 말하고 듣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순간 그 말씀들이 좋았지만 예전처럼 순진하게 와! 그래 맞아 이렇게 할 수가 없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좋은 설교와 서적들은 넘치고 있으며 또 같은 이야기고요. 조용기 목사님 같은 경우 드러내놓고 욕먹지만 그런 목사님과 비교당하며 그래도 괜찮은 목사라는 말을 듣지만 정말 행동해야 할 것을(예수님이 하신 일) 하지 못한다면 그건 더 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젠 좋은 말에 감동이 아닌 그 말과 동시에 행동이 드러났을 때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답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선이 (11-03-30 19:50)
 
네에..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만 좋은 설교와 서적들이 넘치고 있다고 하셨지만,
오히려 제가 느끼기엔 너무나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물어서요. 물론 이또한 상대적인 거겠죠.
저역시 ㄴ ㅏ님께서 찾으시는 말과 행동이 함께 드러나는 사람이 어딘가엔 분명 있으리라고 보는데
꼭 찾으내시길 간절히 바라며, 괜찮다면 소개도 좀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ㄴ ㅏ (11-03-30 21:49)
 
아.. 그러네요. 좋은 책들이 아니었군요.. 뭔가 클리어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깜박했는데
제가 말한 분들은 소수의 설교가들이고요
설교가는 아니지만 정말 행동으로 보여준 한 젊은 지식인(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좀 더 지켜 봐야 하고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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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에 담긴 에큐메니컬 정신 미선이 5954 03-02
48 "인민신학+민중신학=통일신학" 노정선 교수, 한국민중신학회서 주장 미선이 8633 05-26
47 권진관 교수의 민중신학과 화이트헤드 철학 이해에 대한 비평 (1) 정강길 8481 04-20
46 새로운 민중신학의 이름, <살림신학> (3) 정강길 7843 01-20
45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및 학술제를 다녀와서.. (1) 정강길 9545 10-16
44 부르조아의 하나님 : 낙타와 바늘귀, 자본주의, 제국주의 (2) 리옌화 8427 07-14
43 [펌] 깨달음의 사회화 (박재순) 정강길 8576 04-09
42 "손해보고 살자" (광주 연합예배) (6) 정강길 9022 09-11
41 "가장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하나님 나라" 정강길 7347 04-01
40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정강길 7933 03-09
39 학문은 쉬워야 함에도 요구되는 '불가피한 아카데믹함'이란? 관리자 14269 02-22
38 혀짤리고 귀먹고 화상당한 우리의 늙으신 하나님을 아시나요? (최형묵) 정강길 9256 02-01
37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운 사람, 송기득 교수 (정용섭) 정강길 8633 01-30
36 이론과 실천의 함수관계 (* 신학과 삶의 관계) 정강길 7837 12-16
3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후기 (2) 해조 8285 12-11
34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 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820 12-01
33 한국 기독교 신학의 전개과정과 새로운 전환의 신학 정강길 6478 11-14
32 정강길의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을 읽고 나서 (Dong-Sik Park) (2) 관리자 9311 10-27
31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2006 증보판) 출간~!! (2) 관리자 112043 10-25
30 <백두근본주의>에 대한 고찰 정강길 7487 10-25
29 지구화 시대의 민중신학을 위하여~!! 정강길 7550 10-18
28 한국 민중신학자 대회를 다녀와서.. 정강길 6985 09-21
27 일반인과 자각인의 욕구와 영성 (7) 정강길 7260 09-02
26 [펌] 내 신앙의 근본을 뒤흔든 그 말, 민중신학 (정병진) 정강길 7241 09-02
25 책을 읽고.. (김광현) 관리자 6600 09-02
24    이하 광현님과 토론글 모음.. 관리자 7077 09-02
23 민중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 과정철학적 관점에서 (장왕식 교수) 관리자 7737 09-02
22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5)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③ 정강길 7726 08-14
21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4)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만무〉滿無,full naught ② 정강길 7123 08-14
20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3) - '영성수련'의 최고 극치, <만무>滿無 full naug… 정강길 7795 08-14
19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2) - '영성수련'이란 <공부>工夫, Kung-Fu를 말한다! 정강길 7984 08-14
18 새로운 민중신학의 영성론 (1) -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인가? 정강길 12242 08-14
17 '한국 민중신학에 왜 하필 서구의 화이트헤드 사상인가'에 대한 대답 정강길 7373 08-08
16 [펌]에큐에 올라온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서평 (1) 관리자 8770 07-10
15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정강길 6916 07-10
14 민중신학과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문제 정강길 7490 06-17
13 '민중신학연구소' 진영과의 민중론 논쟁글 모음 정강길 7573 05-20
12 ‘다른 관심ㆍ다른 이론적 틀’ 로 논의 "현재 민중신학이 처한 상황과 문제점" (1) 구굿닷컴 7946 05-06
11 [쟁점] 비평 - 맑스주의와 유물론 그리고 기독교 (11) 정강길 8799 05-06
10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에 대한 질문과 답변 (1) 정강길 7195 05-06
9 기존 민중신학이 안티를 걸었던 <서구신학>에 대한 의미 정강길 7297 05-01
8 서남동 신학,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9040 04-30
7 ● 서구신학 / 기존 민중신학 / <새로운 민중신학> 비교이해(필독) 정강길 8775 04-29
6 서남동, 화이트헤드를 만나다.. (5) 정강길 8214 04-28
5 민중사건 그리고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강길 7416 04-28
4 화이트헤드에 기반한 사회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 대하여.. 정강길 7808 04-28
3 민중신학이여.. 제발! 제발! 제발! 미선이 7976 04-28
2 [탈/향 강좌]민중신학 vs. 민중신학, 성서를 읽는 천 개의 눈 (1) 정나진 15080 04-27
1 21세기에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표류할 것인가..!! 미선이 16876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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