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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민중사건 그리고 계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4-28 08:19 조회(7300)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1/8 


 
2002-05-29 02:24:18
 
 
밑의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2002년 5월 포럼글을 읽고서
제 나름대로 몇자 남긴 글입니다..
황용연님의 그 글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
 
 
 
 
현재의 민중신학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전에 얘기한 세계를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부재이지만
두번째는 민중신학에서 민중 개념의 불명확성과 미확정성이다.

 
안병무는 민중을 개념화한다는 거 자체가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고 반대했지만
사실 이것 또한 민중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개념화는 솔직히 우리의 사유 체계가 세계를 해석할 때부터 필연적 패턴으로 잠재된 사태다.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에서 모든 문제들은 민중에 의한 쟁점들로 소급되어 있다.
민중을 모르고서 민중신학을 한다는 건 참으로 가당치 않지만 여태껏 이러한 부족분을
메꾸기 위해 몇몇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에 대한 개념들을 정의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황용연님의 글은 민중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라기보다
어떤 실마리 제공과 문제제기의 차원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의 글에서 핵심은 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은 글의 의미가 상정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계 안에는 우리가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어떤 것이 있다. 이 어떤 것은 재인식recognition의 대상이 아니라, 근본적인 '우연한 마주침rencontre'의 대상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중에서, 여기에서는 서동욱, {차이와 타자} 중에서, 강조는 필자)
 
서동욱에 따르면 들뢰즈(그리고 레비나스도)의 핵심 주장 중의 하나는 '사유는 표상체계 바깥의 무엇에 의해 상처받음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다(서동욱, {차이와 타자} 참조).
 
사실 이 부분의 철학적 토대를 언급하자면
들뢰즈보다 레비나스 텍스트가 더 유효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곧 <타자의 얼굴>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계시란 바로
우연적으로 맞닥뜨리는 <타자의 얼굴>에 해당한다. 레비나스에 있어 그 값어치는
바로 타자의 얼굴이며,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과 직면한 나는 이제 더 이상 세계의 단순한 구경꾼이 아닙니다. 언제나 한번뿐인 타자와의 이 만남에서,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채 우리가 대항할 수 없게 하는 한 <얼굴>의 이 나타남에서,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이 일어납니다. 나는 매번 내가 세계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내가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자입니다."
 
물론 화이트헤드에서도 이 점은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인과적 효과성>과 <현시적 직접성>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현실적 존재는 언제나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같이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의문나는 점은 그렇다면 황용연씨가 말한 계시의 근원이 되는
소수자 주체성이 처음에는 어떻게 성립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는 소수자 주체성은 그 자체로써 이미 주체성을 가진다고만 언급되어 있다.
황용연씨는 주체성이 선행한다고만 했지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지에 대해선 빠져있는 것이다.
 
혹시 그 또한 다른 계시의 근원이 되는 또다른 소수자 주체성에 이끌려서
연쇄적 반응으로 생기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주체성>라고 표현할 때
우리가 주체성의 <주체다움>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소수자 주체성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모호한 것이다.
황용연씨는 단지 소수자 주체성은 특정의 인격이 아니고 사건이라고 했지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언급이 없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전태일 사건의 예를 들어 말해보겠다..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전태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다같이 억압받고 고통받는 상황에서 왜 하필 유독 전태일이 눈을 떴던 것인가.
만약 황용연씨가 말한 <수동적 구조>로 성립된 사유의 본성인 계시만 있다면
전태일만 눈떠야 할 게 아니라 전태일과 똑같이 착취당하고 있는
당시 노동자들도 같이 눈떴어야 한다고 봐야 옳다.

이점에서 타자원인성을 강조하는 이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는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필연적으로 같이 봐야한다.
 
사회학자 미드(G.H.Mead)의 언급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은
타자에 의해 조직화된 대상적 의미의 'me'의 구조와
주체로서의 'I' 의 차원을 함께 가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아란 바로 me와 I 의 대화>다.
이때 주체로서의 새로움과 결단은 바로 'I'의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예수 사건과 전태일 사건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오클로스 또는 민중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꼽아야 한다면 바로 <예수>며 <전태일>이어야 한다.
 
세계 안의 모든 것은 이미 사건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민중사건이라고 할 때의
특정한 새로움의 지점은 바로 예수사건에서 <예수>이며,
전태일 사건에서 <전태일>에 핵심이 더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민중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가장 기본적 단위가
바로 <계시에 대한 눈뜸>에 다름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의 민중신학에서는 바로 이것을 <자각>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곧 필연적으로 내적 결단에서 작동되는 것이다.
민중사건은 바로 실존적 결단에서 그 값어치가 될 만한 것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이후의 현실 세계 전체에 영향을 끼칠 새로운 색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체의 <해체>만 얘기한다면 이것은 결코
설명되기 힘들며, 타자로 환원되기 쉽상일 수 있다.
여기에 바로 새로움을 동반하는 <재구성>으로서의 주체 지점이 놓여있는 것이다.
예수의 결단, 전태일의 결단은 이전 세계의 어디에도 없는 바로 그들 고유의 새로움이다..
 
이미 억압과 부조리한 문제는 우리 존재의 뿌리 기반에 만연된 것이지만
대부분이 이것에 눈을 뜨지 못하기에
세계는 갈수록 고질화 혹은 고착화 되어가는 것이다.
황용연님이 말한 '드러남'이 '은폐'로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의 본래 의미도
결국은 이미 세계 안의 억압과 부조리의 문제들이 풀릴 수 없을 만큼 얽혀있고
이것이 결국은 고질적으로 매너리즘화되어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선택적 결단들은 늘상 맹목적 충동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것에서는 세계를 변혁하는 새로움을 발견할 수 없고,
세계 안에 은폐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결단은 세계 안의 유동하는 사실을 넘어서 있는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영속성에 대한 추구 혹은 발견이 필요하다. 그럴 경우
인간은 맹목적 충동이 아닌 <자각된 열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진보란 바로 <자각된 열망>이 <맹목적 충동>을 압도할 때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안병무는 이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 있는 언급을 부지불식 간에 한 적 있다.
"<하나님의 뜻>은 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인간의 결단>과 더불어 이뤄진다."
 
내가 보는 온전한 의미로서의 계시의 속성도 바로 이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바로 우리가 <민중사건>이라고 할 때에
그러한 민중사건의 가장 궁극적인 <단위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안의 진보적인 사회변혁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2-05-29 02:24:18 /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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