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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3-09 15:10 조회(7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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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화산맥, 민중신학적 종교다원주의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에 대한 엄밀한 고찰
 

정강길 minjung21@paran.com

 
 
<깨달음>은 화산맥처럼 터지는 민중사건의 소스
 
민중신학에서 안병무의 <화산맥>이란 용어는 매우 중요한 수사적 표현이다. 역사 속에서 민중사건은 화산맥처럼 터진다. 그렇다면 그때마다 터져 나오는 저마다의 변혁사건의 중심적 기반은 무엇인가? 기존 민중신학에서는 이를 '민중사건'이라고만 말한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민중신학은 예수사건을 예수와 오클로스 간에 '주객이 없는 민중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대체로 기존의 민중신학은 거기까지였고 그 변혁 기반에 대한 그 이상의 밀도 있는 분석적 작업으로 나아가진 못했었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는 화산맥처럼 터지는 민중사건을 가장 미시적인 사태에서부터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변혁의 기반으로 삼는 '민중사건'에 있어서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사건의 <예수>이며, 전태일 사건의 <전태일>이야말로 변혁사건의 진정한 거점이 아닐는지. 즉, 이를 미시적 사태에서부터 분석해본다면 그것은 예수의 <자각>consciousness이며, 전태일의 <자각>이야말로 화산맥이 분출하는 소스들(sources)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각>(=깨달음)이라는 미시적 해방사건의 내적 구조
 
그렇다면 <자각>이란 무엇인가? 자각이란 찰나에 일어나는 통찰적 사건event이다. 안병무는 이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매우 중요한 언급을 제시한 바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하나님의 뜻은 홀로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인간의 결단과 함께 더불어 이루어진다.”(『역사와 해석』p.71)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자각>이라는 사건의 내적 구조를 이미 암시하고 있는 언명이기 때문이다. 자각은 세계 안의 진보가 발현되는 지점이며, 그것은 순간에 발생하는 영구적 혁명에 대한 참여적 사건이다. 그러한 <자각>이라는 사건의 내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신의 주체적 목적(하나님 나라)+현실 세계(고통 받는 타자)+주체자의 합리적 응답(참여적 결단)=자각(직관적 통찰)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질 때 <자각>이라는 미시적 사건이 생성된다. 자각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도외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체적 목적은 모든 존재의 창조적 생성의 첫 위상에 함께 한다(화이트헤드). 그리고 현실 세계는 모든 존재들이 영향 받고 있는 관계적 기반들에 속할 수 있다.
 
아무래도 중요한 관건은 이를 경험하고 느끼는 주체자의 응답여부일 것인데, 이때 자각이라는 사건은 필연적으로 신의 주체적 목적과 그 자신이 과거로부터 계승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대비(contrast)로 하여, 이를 여건으로 느끼는 그 자신의 의식적 판단에서 일어난다.
 
즉, 쉽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신의 주체적 목적)와 ‘고통 받는 타자’(현실세계)라는 이 둘을 대비로서 그 자신이 필연적으로 느껴야만 최소한 <자각>이라는 사건이 형성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고 하겠다. 사실상 자각(혹은 깨달음)은 매우 고등한 현실적 존재에 해당하며,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 사건이자, 세계 안에서 이것은 고등한(종교적) 경험으로서 드러나고 있다.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라는 명제가 가능하지 않은 경우
 
이제 예를 들어, 예수사건을 보자. 이때 신의 주체적 목적은 예수가 지향했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또한 예수의 현실 세계는 1차적으로 갈릴리 현장의 고통 받던 오클로스가 이에 해당한다. 예수는 바로 여기에서 이 둘을 대비로 느꼈기에 결국은 응답적 결단을 내리고 십자가를 지는 쪽으로 그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게 된다.
 
전태일 사건을 보자. 이때 개입되는 신의 주체적 목적은 노동해방 세상일 것이다. 물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근로기준법의 실현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노동해방 세상을 위한 방편으로서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또한 전태일의 현실 세계는 1차적으로 함께 고통 받던 그 당시 공장노동자들의 실태다. 전태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앞의 그 둘을 대비로 느꼈기에 결국은 응답적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온몸을 불사르며 생명을 내어주게 된다.
 
이때, 이 둘을 대비로 느끼면서 참여적 결단을 의식적 판단에서 내리기까지가 바로 <자각>이라는 미시적 해방사건에 속한다. 이러한 깨달음, 곧 자각은 그 때 당시 갈릴리 오클로스의 의식 속에는 발생되지 않았던 예수 고유의 것이며, 전태일 사건에서도 당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는 없었던 전태일 고유의 것에 속한다. 그 자각이라는 미시적 해방사건이 세계를 일깨우는 진보를 향한 변혁의 출발지요 진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은 저 깊숙하고도 미시적인 존재론적 지평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서 결국은 사회와 온 우주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변혁사건이 어디에서부터 창조적으로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기존 민중신학의 주장 가운데는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라고 했었지만, 새로운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는 민중이지만 민중은 예수가 아니다”라고 본다.
 
예수는 오클로스와 같은 처지의 민중이지만, 그러한 오클로스가 죄다 예수는 아닌 것과 같으며, 전태일은 노동자였지만 노동자들이 죄다 전태일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만일 기존 민중신학에서처럼 예수사건을 단순히 '주객이 없는 사건'라고만 기술한다면 이러한 요인들은 희석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는 그 자각이야말로 사회적 지평의 민중사건을 이끌어나가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은 바로 이 자각을 통해 문명을 살찌우는 고등한(종교적) 사건으로서 현시된다. 정확히 말해서, 종교란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한다.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라는 명제가 가능한 경우
- <민중신학적 종교다원론>의 근거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오클로스가 서로 구분될 수 있고, 전태일과 당시 노동자도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예수’와 ‘전태일’은 같이 놓고 볼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나는 “그렇다”고 본다. 적어도 양자가 보여주는 패턴으로서의 사건은 동일하다는 얘기다.
 
전태일 역시 평화 시장의 예수 아니던가. 인식을 넓히기 위해 여기에 동학운동의 최수운까지 연장해서 생각해보라. 단지 그 내용에 있어 저마다의 상황적 특수성에 따라 다를 뿐이지 이들은 내가 말하는 민중사건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들은 <깨달음>이라는 사건에 기반하면서 지속적으로 그의 생애 전체를 거대한 민중해방사건으로서 폭발시킨다.
 
이른바 화산맥처럼 터지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지평에서는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라는 명제는 성립가능하다. 다시 말해 기존의 민중신학은 지금까지의 부정확했던 민중론 때문에 혹은 민중사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부재했었기에 그 같은 명제가 주는 다의적 의미로 인하여 헷갈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라는 명제에서는 그 자신의 익숙한 시공적 기반과 유용한 정서에 따라 누구를 그리스도로 모시던지 하는 것은 자유롭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민중신학에서 <민중신학적 종교다원주의>가 가능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사건>에 대한 분석으로써 이끌어 낼 수 있다.
 
예수를 선택하든 전태일을 선택하든 동학의 최수운을 선택하든 이들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도 이 땅에 유용함을 주고 있다는 점만큼은 너무나 명백하고도 엄연한 사실로 남아있다. 반면에 그 속성만큼은 유일회적이라고 본다. 쉽게 말하면, 예수사건 하나를 통해서도 세계 안의 그 모든 변혁적 민중사건들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안병무가 화산맥을 말하면서 예수사건을 <원사건>으로 본 것의 진정한 맥락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민중사건이야말로 메시아적 사건” 이라고 충분하게 말할 수 있는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전거에 속한다고 하겠다.
 
불교 역시도 여기에서 새로운 민중신학의 해석학적 기반으로서의 사건이해에 포함가능하다. 싯달타에게서 신의 주체적 목적은 해탈 즉, 니르바나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자신의 현실 세계는 고난과 고통의 질곡에 빠진 중생이라고 볼 수 있다. 싯달타는 바로 여기에 이를 대비로 느끼면서 중생들에게 해탈의 길을 제시하는 참여적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예수의 삶이고 불교 역시 싯달타의 삶 자체에서 그 출발을 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지 예수는 생명을 내주었고, 싯달타는 설법을 세계 안에 주고 있을 뿐이다. 어느 것을 택하든 구원이 길로 인도된다고 보지만, 그 선택은 문화적 특수성과 관련한 시공적 특질과 제약의 문제다.
 
자각인과 그리스도(메시아)
 
덧붙일 것은, 예수에게는 고통받는 민중의 양상이 그 자신 안에서도 반영되고 있지만, 고통받는 민중들이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수동적 측면 뿐 아니라 적극적 개선이라는 <지속적 정당성>까지 온전하게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각인이 곧바로 그리스도는 아니기에 자각인이라고 해서 마냥 메시아라고 말하긴 힘들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잠깐 반짝하고서 퇴락하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통해 쉼없이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나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영성은 조금도 끊어지는 법이 없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각인은 메시아적 가능성을 밟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으며, <메시아>라는 존재는 유용한 저항과 사랑의 보편성을 그의 생에서 지속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인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객체적 불멸성으로 이어질 때 메시아로서 고백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전태일 역시 메시아가 아예 못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이렇게 얘기하면 순진한 보수 기독교인들은 비판이랍시며 "그러면 '전태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말해도 되냐"는 식으로 응수한다. 아, 이 얼마나 가소로운 아규인가!).
 
오늘날 양식있는 현대인들조차 저토록 숭앙할 정도인데, 만일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이 신화를 생활화하던 고대에 발생된 사건이었다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 의해 어쩌면 『전태일 평전』은 복음서만큼의 숭앙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잖은가. 아니라고 솔직히 누가 장담할 것인가.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민중사건>이야말로 민중신학의 종교다원주의적 범주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민중신학의 미시사건은 바로 <자각>이라는 사건이며, 그것은 곧 지구화 시대에도 지속적인 투쟁을 가능케 하는 <혁명의 시간>(네그리식 표현)에 해당한다. 깨달음 곧 자각은 우주적 연대와 저항에 대한 합리적 눈뜸이다. 진보의 역사가 되고 있는 화산맥은 바로 이를 거점으로 해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화산맥은 <민중신학적 종교다원주의>가 가능함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민중신학이 민중신학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안의 진보의 원천이 되고 있는 <민중사건>들을 어떻게 분석해내고 일반화할 수 있느냐에 따라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문제라고 하겠다. 특히 세계 안에 가장 일반화된 민중사건일수록 <민중신학적 종교다원주의>는 두드러지게 체계화될 수 있다고 본다.
 
생각컨대, 지금까지 '전태일 사건'에서 메시아성을 읽어내는 그런 종교다원주의는 여지껏 없었다.  아마도 있다면 <민중신학적 종교다원주의>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민중신학적 종교다원론의 새로운 모색이자, 기존의 종교다원주의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존의 종교다원주의가 주로 신 중심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이해에 기반해 있었다면, 민중신학의 종교다원주의는 아예 사건 중심의 이해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누가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가? 놀랍게도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사건>이야말로 구원의 역사가 머무는 곳이라고 지금까지도 줄곧 증언해 오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사건>이라는 것은 적어도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발견되거나 혹은 가능할 수 있는 매우 뚜렷한 범주적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

(* 참고로 윗글과 함께 나 자신이 보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참조한다면 한결 이해가 수월하리라고 본다.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제7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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