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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민경식)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12-14 15:07 조회(4921)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d003/9 


현재 기독교사상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2006년 11월호
 
 
성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글쓴이 / 민경식
 
 
 
 들어가는 글

이번 호에서는 성서의 앞뒤가 “문자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을 다룰 것인데, 이것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구약과 신약이 일치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겠고, 이어서 신약성서 자체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 즉 신약성서의 한 문서 안에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소개하겠다. 신약성서의 문서들끼리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이미 지난 호에 충분히 설명하였기 때문에 이번 논의에서는 제외한다. 마지막으로는 우리말 개역개정판(1998)과 새번역(2001)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본문들을 살펴보고, 왜 서로 다른 번역이 실리게 되었는지 알아보겠다.
성서의 앞뒤가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락들을 소개함으로써, 성서의 문자주의적 해석을 다시 한 번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또 성서의 번역 과정에서 생기는 차이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성서, 구약과 신약이 맞지 않는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네 복음서 가운데 최초로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개역개정판》 마가복음 1:1-5)

이 단락을 수없이 많이 읽어본 성서 독자라 하더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과 관련된 보도인데, 마가는 여기서 구약성서를 인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인용문을 살펴보자. 적어도 마가의 보도에 따르면, 이사야서에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사야서의 그 구절을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서에 위의 구절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런 구절이 없다! 다만 비슷한 구절은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개역개정판》 이사야 40:3)

우리말 성서에 보면, 이사야 40장 3절이 마가복음서에 정확하게 인용되지 않았다. “광야에서”라는 부사구가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문장 안에 들어있고, 신약에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는 문장 안에 들어있다. 즉, 구약에서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서 외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하여간 그 소리가 외치기를,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그 소리가 광야에서 외치는데, 어디서 길을 예비해야 하는지는 밝히지 않지만 하여간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칠십인역의 구약 본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본문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즉 칠십인역에 “우리 하나님의 길”이 마가복음서에 “그의 길”로 나타날 뿐이다. 실명사가 대명사로 나타나는 차이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큰 차이가 아니다. 마가복음서의 대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번역에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광야에서”라는 구절이 문법적으로 앞의 것(“외치는 자의 소리”)과 연결될 수도 있고, 또 뒤의 것(“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초기 사본들에는 구두점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사야서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는 마가복음 1장 2절의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약인용구는 어디 나오는 것인가? 말라기서에 보면 비슷한 구절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개역개정판》 말라기 3:1)

말라기서의 보도는 마가복음서의 보도와는 다소 다르다. 그리스어를 보면, “길을 준비하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동사가 마가복음 1장 2절과 말라기 3장 1절이 다르다. 또한 사자가 길을 준비할 텐데, 마가복음에서는 2인칭 단수인 “너”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말라기서에서는 1인칭 단수인 “나”보다 앞서서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말라기 3장 1절이 마가복음 1장 2절에 가장 가까운 구약 본문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이 구약성서 인용 바로 앞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라는 표현이 나옴으로써 이 인용문이 마치 이사야서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마가복음 1장 2-3절에서 인용된 구약본문은 사실 말라기서 본문과 이사야서 본문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래서 어떤 필사자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를 “선지자들(또는 예언자들)의 글에”로 변경시키기도 하였다(알렉산드리아 사본, 프리어(또는 워싱턴) 사본, 소문자 사본 가계 13, 다수본문 등). 마태복음 27장 9-10절도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개역개정판》 마태복음 27:9-10)

위의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위에서 인용된 구약 본문이 예레미야서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구절이 없다. 다만, 예레미야 18장 2-3절과 19장 11절에 토기장이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본문은 분명히 마태복음서에 인용된 구약 본문이 아니다. 오히려 스가랴 11장 12-13절에 비슷한 본문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개역개정판》 스가랴 11:12-13)

이 인용문이 예레미야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몇몇 필사자들은 “예레미야”를 “스가랴”로 고침으로써 신약과 구약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하였다.(소문자 사본 22) 위의 두 가지 예에서 잘못 인용된 구약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서 본문을 잘못 써주셨거나 잘못 불러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이 단순히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다. 야고보서 4장 4-7절의 말씀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새번역》 야고보서 4:4-7)

두 번에 걸친 구약인용문이 나타난다. 5절의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인용과 6절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인용이다. 두 번째의 것, 즉 6절의 인용문은 잠언 3장 34절이다. 우리말 번역 성서에는 구약과 신약이 다소 다르게 번역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신약 원문과 칠십인역 구약 원문을 비교하면, 두 본문이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을 하나님으로 고친 것 외에는 칠십인역의 본문을 문자 그대로 옮겼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앞 절, 즉 야고보서 4장 5절의 인용문을 구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외경에도 없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이와 똑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야고보서의 저자가 베드로전서를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야고보서를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두 저자가 공통의 자료를 알고 있었는지를 논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야고보서의 구약 인용문이 결코 구약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마가복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약성서에는 27권의 책이 있는데, 각 책들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지난 호에서 살펴보면서,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 처형 날짜를 언급하였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고 나서 그 다음 날 처형되었는데,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유월절 준비일, 즉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처형당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마가의 예수 이야기를 보면, 한 복음서 안에도 보도가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안식일이 시작되자,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였고(막 14:12 이하), 식사 후에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셨다.(막 14:32 이하) 여기서 체포당하시고(막 14:43 이하), 밤새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셨다.(막 14:53절 이하) 새벽에는 빌라도에게 끌려가셨다.(막 15:1 이하) 결국은 십자가에서 달리셨고(막 15:21 이하),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다.(막 15:33 이하) 그 다음에 이러한 보도가 나온다.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그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이 요셉이 왔다. … 이 사람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하였다.
(《새번역》 마가복음 15:42-43)
 
이미 마가복음 14장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시지 않으셨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도행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난 호에, 사도행전에 바울의 체험이 세 번에 걸쳐 보도되는데, 각 보도마다 차이점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한 가지만 예를 더 들어보도록 하겠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개역개정판》 사도행전 12:25)
 
새번역도 이와 비슷하게 번역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어 원문은 도저히 이렇게 번역될 수가 없다. 직역을 하자면, “바나바와 사울이 임무를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번역이 된다. 그런데 이 번역은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다. 사도행전 11장 27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자 안디옥 교회에서는 구제헌금을 걷어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그것을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완수하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한다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던가, 또는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고 해야 앞뒤가 통한다. 그래서 우리말 개역성서나 새번역은 이것을 문맥에 맞도록 번역하였다. 물론 성서 번역자들이 그리스어 원문을 자의적으로 변경시킨 것은 아니다. 유력한 몇몇 고대 사본들(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과 다수본문이 그리스어 원문의 독법인 “예루살렘으로”를 지지하지만, 적지 않은 사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라는 이문(異文)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자들은 이야기 흐름에 맞지 않는 본문의 독법을 포기하고, 이문을 선택하여 번역한 것이다.

물론 또 다른 해결방법이 있다. 공동번역의 번역인데, 이 번역은 원문을 교정하지 않고도 문맥에 맞는 문장을 만들었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사명을 다 마치고 마르코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다시 돌아갔다.
(《공동번역개정판》 사도행전 12:25)

그리스어 전치사 “에이스”는 일반적으로 “…안으로”(into)로 번역되지만, 많은 경우에는 “…안에”(in) 또는 “…에서”(in)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개역이나 새번역에서 “예루살렘으로”로 번역된 부분은 처소격인 “예루살렘에서”로 번역될 수도 있다. 또한 문장 구조적으로 이 구절이 개역이나 새번역처럼 “돌아왔다”는 문장과 연결될 수도 있지만, 또한 “사명을 마치고”(또는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와도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굳이 “예루살렘으로부터”라는 이문을 선택하여 번역하지 않더라도, 공동번역처럼 번역한다면 그리스어 본문을 문맥에 맞게 번역할 수 있다. “바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임무를 마치고 마가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몇몇 사본들에는 “안디옥으로”라는 표현이 여기에 삽입되어 있다.
 
성서, 개역과 새번역이 맞지 않는다.

2004년 『대조성경』이 나오면서부터 우리말 개역과 새번역을 한 눈에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독자들에게 제공되었다. 직역에 가까운 개역을 읽다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단락이 있으면, 바로 옆 단의 새번역을 읽어볼 수도 있고, 반대로 의역에 가까운 새번역을 읽다가도 개역을 참조하기가 편하게 편집되어 있어, 성서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대조성경』을 늘 가까이 하다 보니, 개역과 새번역의 번역에 차이가 있는 것들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같은 신약성서인데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일까? 두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마태복음서의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한 아들은 싫다고 말한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해놓고서는 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개역개정판》 마태복음 21:28-30)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은 대답하기를 '싫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그는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서는, 가지 않았다.
(《새번역》 마태복음 21:28-30)

위의 두 번역을 비교하면, 두 아들의 역할이 개역과 새번역에 바뀌어 보도된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가? 이것은 그리스어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과정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번역 대본의 문제이다. 개역이나 새번역 모두 번역 대본의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다만, 개역이 번역한 대본과 새번역이 번역한 대본의 본문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학문용 신약성서는 네스틀레-알란트 판이라고 불리는 신약성서(Novum Testamentum Graece)인데, 현재 27판까지 나와 있으며, 곧 28판이 디지털 형태로 출판될 예정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신약 번역대본으로 사용되는 성서이다. 그런데 1979년, 이 성서가 25판에서 26판으로 바뀌면서 상당히 많은 본문이 변경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단락이다. 25판까지의 본문에는 개역과 같이 둘째 아들이 싫다고 하였다가 뉘우치고 일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26판부터는 큰 아들이 싫다고 하였다가 뉘우치고 일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번역 대본이 되는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 바뀌는 이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고대 사본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또 본문비평이라는 학문이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료와 더 우수한 방법론으로 기존의 본문을 평가하고, 때로는 이처럼 본문을 변경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더 고대의 우수한 본문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1979년 이후에 번역된 새번역과 그 이전에 번역된 개역 사이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역개정판은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기존의 개역한글판을 개정한 것으로, 처음 번역할 때의 대본의 본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사도행전 10장이다. 고넬료가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환상 가운데 천사가 나타나더니, 욥바로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고넬료는 사람들을 욥바로 보낸다. 다음 날, 그들이 욥바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도 환상을 보게 되고,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그들이 베드로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때 천사가 베드로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개역개정판》 사도행전 10:19-20)

베드로가 그 환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일어나 내려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거라.”
(《새번역》 사도행전 10:19-20)

성령은 몇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왔다고 일러주는가? 개역에 따르면 두 사람이고, 새번역에 따르면 세 사람이다. 이 본문 역시 위의 마태복음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본의 본문이 바뀐 경우이다. 참고로, 고넬료는 “하인 두 사람과 자기 부하 가운데서 경건한 병사 하나”(행 10:7), 즉 세 사람을 욥바로 보냈다고 보도된다.
 

나가는 글

구약은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하고, 신약은 오신 그 메시아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성서는 전체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통일성 안에는 다양성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각 문서마다 독특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만큼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문자적인” 모순들이 있다. 또한 성서의 한 문서 안에도 앞뒤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서 저자들의 한계에 기인하는 실수들로서, 때로는 성서 저자들의 불완전한 기억력 때문이고, 때로는 착각 때문이며, 때로는 단순한 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헐적인 오류를 발견한 필사자들은 부분적으로 그것들을 수정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교정에는 나쁜 의도가 들어있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서의 본문을 변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성서의 앞뒤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서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사람인 이상, 실수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성서가 절대적으로 완벽하며 따라서 “문자적으로” 점 하나 선 하나 틀린 것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성서의 모순을 발견할 때, 바로 그때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성서의 형성과 필사전승 과정, 또 정경화 과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권위가 앞뒤의 문맥이나 문자적인 완벽함에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성서는 하나님이 직접 써주셨거나 던져주신 신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믿음의 선배들이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증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영감을 받은 성서 저자들이 기록한 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를 얻으니, 성서, 참으로 귀하고 값진 책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에서는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성서 구절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민경식 l 박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B. A)와 같은 대학원(Th. M)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Dr.theol.)에서 신약성서 본문비평 및 신약성서 사본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와 감리신학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Die fruheste Uberlieferung des Matthausevangeliums (Berlin/New York:Walter de Gruyter, 2005)가 있다. 

글쓴이 / 민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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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새 교황 프란치스코, 신학적으론 보수, 경제문제에선 개혁 미선 749 03-21
102 “세속 성자들 많이 등장하고, 새로운 교회 생태계 만들어 나가야” (1) 미선 1099 11-23
101 한국 신학의 세계화 위한 ‘동서신학포럼’ 창립 (1) 관리자 1109 10-29
100 세계 기독교 양대산맥 WEA-WCC 첫 대화의 장 열렸다 관리자 1024 10-24
99 개신교 주요교단 예장통합, 한기총 탈퇴 미선 1150 09-21
98 “지난 100년… 이슬람은 2배, 무신론은 10배 성장” 관리자 1223 07-18
97 힉스 입자, 창조에 말을 걸다 (3) 관리자 2054 07-14
96 중산층, 사회운동 주체…‘시민신학’ 제기 (1) 관리자 1209 07-01
95 현재의 한국 복음주의 진영을 알 수 있는 좋은 글들 (1) 미선 1487 04-07
94 "기독교인이 가톨릭과 '맞장' 뜨겠다고 했다" 관리자 1433 03-04
93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과 연합의 방안 관리자 1416 02-14
92 “개신교 ‘자기보기’ 안 돼” 관리자 1441 12-08
91 "한국교회 부패는 '자기신학' 없기 때문" 관리자 1694 10-29
90 “보수-진보 신학의 주제들, ‘양자택일’ 아니다” (1) 관리자 1807 10-18
89 <뉴스앤조이>가 증발할 뻔 했다! 관리자 3681 09-01
88 예장통합 한기총 탈퇴 운동 본격화 관리자 1841 08-12
87 전세계 교회 분열시키는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 (1) 관리자 2247 07-29
86 英복음주의 거장 존 스토트 목사 타계 (1) 관리자 2098 07-29
85 '새 시대를 위한 새 신학과 설교' 주제로 신학 심포지엄 개최 (1) 관리자 2049 06-21
84 "한국교회 '제2의 종교개혁'해야" (1) 관리자 2242 06-21
83 이형기 바른교회아카데미, "사역자가 권력 되면서 한국교회가 무너졌다" (1) 관리자 2268 05-26
82 한기총 해체가 과연 답인가 관리자 1711 04-09
81 한기총, 왜 리모델링이 아닌 해체인가? 관리자 1670 04-09
80 “한기총은 불필요 악, 개혁 아닌 해체가 답” 관리자 1592 04-05
79 ‘개신교의 사회적 책임’ 평가 표준 만든다 (1) 관리자 2073 03-17
78 개신교 단체들, "한기총이 해체되야 개신교가 산다" (1) 관리자 1892 03-17
77 필립 얀시가 말하는 미국교회의 미래 희망찾기 (1) 미선이 2656 02-21
76 한국교회 신뢰도 또 추락...기윤실 "한국 교회의 구조적 문제가 원인" 관리자 2931 12-15
75 “종교를 배격하는 과학은 맹목적 신앙만큼 惡하다” (1) 관리자 2314 09-04
74 [펌] 미국 복음주의 몰락 (Richard Gamble) (1) 미선이 3075 07-06
73 과학과 신앙, 양립할 수 있다? 없다? (3) 미선이 3024 11-02
72 “기독교 언론, 서클주의에서 벗어나라” (1) 미선이 2554 08-08
71 손봉호 박사 “땅에선 자본주의, 하늘에선 사회주의” (1) 미선이 3322 07-31
70 목사의 원래 자리 찾기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 (1) 미선이 2309 07-20
69 '오방 최흥종 목사' 기념길, "이런 목사라면 길을 내줘도 아깝지 않아!" 미선이 3003 07-13
68 "예배 중 정부 비판하면 소환됩니다!" 미선이 2056 07-06
67 한동대 총학, 노 분향소 설치 반대 '파문' 미선이 2206 06-03
66 김진홍 목사, '盧전대통령 폄훼' 발언 파문 (1) 미선이 2620 05-26
65 몰트만 박사,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입니다” 미선이 2700 05-18
64 서구신학 폐해, 동양과 접목으로 극복해야 (1) 미선이 2231 05-06
63 교리 개혁 없이 교회 개혁은 보이지 않는다 미선이 2123 05-01
62 루터와 칼빈과 웨슬레를 버려야 개혁이 보인다! (1) 미선이 2268 04-27
61 부산장신, 배현주 교수 '조건부 복직' 결정 (2) 미선이 3015 04-21
60 TV 속 목사들, 설교인가 쇼인가? (2) 미선이 2275 04-18
59 '교회 타락 시키는 베스트셀러' 쓴 조영엽 박사···'릭 워렌 목사가 교회 … 미선이 2701 04-06
58 미국, ‘기독교 국가’색 점점 옅어지고 있어 미선이 3148 03-27
57 진화론과 종교는 상호보완적 관계 미선이 2756 03-20
56 촛불교회, 용산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비추다 미선이 2205 03-10
55 "나를 태워 어둠 밝히는 교회 세운다!" 미선이 2142 03-02
54 고통의 현장, 촛불예배로 함께 하라 미선이 2212 03-02
53 복음주의 지성들도 '이슬람 포비아' 망령 미선이 2699 02-20
52 용산참사 추모기도회, "당신의 죽음을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미선이 2173 01-27
51 한국교회의 죄를 고발합니다 (2) 미선이 3013 01-14
50 복음으로 포장한 '성공주의' (1) 미선이 2415 01-09
49 "나보고 불쌍하대, 지옥 간다고" 미선이 2555 01-05
48 저명 목회자 등, 성탄 맞아 이웃돕기 나서 (1) 미선이 3119 12-27
47 목사여, 신천지에 이렇게 대응하라 (2) 미선이 2938 12-01
46 기윤실, 한국교회 신뢰도 조사에서 꼴찌로 나와 (3) 미선이 3215 11-22
45 오바마의 등장, 미국 복음주의자들 ‘시큰둥’ (2) 미선이 2725 11-07
44 “동성애 잘못이지만 동성애자 사랑하자” 미선이 3093 10-18
43 "한국 교회에 창궐하는 사이비 과학" 미선이 3086 10-03
42 개신교 진보진영의 한계? (정강길님 칼럼에 대한 반론) (3) 미선이 3232 09-30
41 뉴스앤조이 사기성 모금, 시민단체에 고발당해 (2) 미선이 3484 09-22
40 창조 과학인가? 창조 신앙인가? 미선이 3222 09-22
39 "사회정의 설교했다면 대형교회는 없었다" (1) 미선이 3136 09-20
38 구교형·정연길 목사, '8·15 촛불행진'서 연행 미선이 3495 08-16
37 예수역사학 상식수준에 왜 흥분하는가? (1) 미선이 3024 07-17
36 손봉호 등 사회 원로 "이제 촛불을 내리시오" 미선이 2994 07-01
35 소득세 내는 목사 "아니 이런 혜택까지!" 미선이 3463 06-27
34 여의도순복음교회 예배 참관기, 조 목사 영향력...벗어나 성숙한 교회 될 때 미선이 3510 06-13
33 한국교회, 신자유주의에 감염되다 (김종희) 미선이 3406 05-16
32 이명박 정부가 살 길, 미친 소 수입이 아니다 미선이 2683 05-08
31 “인권문제 말하되 올림픽은 존중하자” 교계, 성화 봉송 저지에 우려 미선이 2915 04-27
30 장로 대통령 당선 이후 교회 정치세력화 가속 미선이 2943 04-27
29 대운하 백지화 위한 '기독교행동' 본격 출범 미선이 2733 04-22
28 KBS시사기획 쌈 나신하 기자 인터뷰, "지금 교회 모습 바람직한가" 미선이 3555 04-19
27 이번에는 KBS, '교회의 정치바람' 다룬다 미선이 2918 04-16
26 [좌담]박득훈·백종국이 말하는 개혁연대와 교회 미선이 2812 04-05
25 "기독교 이름으로 정치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미선이 2947 03-31
24 [단신] 17개 기독 단체, 기독교정당 행보에 제동 미선이 3014 03-28
23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웨신대 산학협정 체결 미선이 4056 03-25
22 바알주의, 한국교회를 위협한다 미선이 3687 03-14
21 한미FTA를 저지해야 할 신앙의 이유 미선이 2611 02-13
20 세금 납부가 세속화? 종교개혁 이전 얘기일뿐! 미선이 3031 02-06
19 "한국교회 타락 주범, 맘몬신앙과 기복주의" 미선이 4586 01-24
18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 인터뷰 미선이 4019 01-20
17 질문 없고 복종만 있는 교회, 청년 등 돌린다 관리자 3383 01-19
16 복음주의 신학의 모순 (김주범) 미선이 3313 01-04
15 개혁적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보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문법 (구교형) 관리자 3460 12-29
14 복음주의 진영의 통일운동과 그 한계 넘기 정강길 3240 07-06
13 통전적 신학을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정강길 3910 03-14
12 소위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기독 진영의 한계 (김경재) 정강길 4366 06-06
11 "한국개신교, 무엇이 문제인가?" 정강길 4559 03-02
10 성서, 신비한 암호책이 아니다 (민경식) 관리자 3927 01-30
9 성서, 윤리적이지 않다 (민경식) (1) 관리자 4602 01-07
8 성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민경식) 정강길 4922 12-14
7 [펌] 복음주의와 성경 무오설에 대한 문제 (목창균) 정강길 5167 12-14
6 [펌] 여전도사가 고백한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성차별 관리자 3983 11-12
5 [필독] '무조건 믿어라'의 내용에 따른 기독교 분류 정강길 6104 07-02
4 전체 한국 기독교 신앙을 보는 개괄적 이해 (처음 오신 분들은 필독!!) 미선이 8301 04-21
3 문제점 많은 책, 목창균의 『현대신학논쟁』 정강길 4340 07-14
2 [펌]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탐구 관리자 3612 06-06
1 복음주의 진영, 어떻게 볼 것인가 (2) 정강길 9981 04-28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