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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12-19 02:44 조회(334)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b001/559 




앞의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그리고 (2)  (3) 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약간은 학술적인 글이지만 찬찬히 한 번 읽어보시고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13. 함석헌과 안병무의 차이

어찌보면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새로운 기독교 신학)은 기존의 민중신학과는 너무나도 다른 신학일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새로운 민중신학은 1세대의 민중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볼 수 있겠다. 유물론적 토대를 구축하려고 했던 2세대와는 다른 방향을 추구하기에 학문적 계보로 보면 여기서부터 갈라진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1세대가 절박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학문적 체계화에 제대로 신경을 못썼다고 보는 지점에서, 2세대는 1세대의 민중신학에 과감하게 정치경제학을 도입시키지만,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1세대 민중신학의 학문적 체계화를 위해 학문의 기초 뼈대인 형이상학이라는 철학부터 먼저 도입시킨다. 이로 인해 새로운 민중신학과 기존의 민중신학은 그 색깔이 확연히 바뀌는 것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민중신학은 오히려 애초의 함석헌의 씨알사상과는 조금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민중신학의 학문적 태동의 배경으로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이 태동했다는 학문적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 새롭게 재탄생한 기분마저 든다. 물론 이 책에서는 함석헌 사상과의 비교는 다루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민중신학이 1세대, 2세대, 3세대로 가면 갈수록 함석헌의 <씨알사상>과는 점점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느낌이다.
 
함석헌의 사상은 김경재 교수나 박재순을 비롯한 몇몇 분들에게만 주목되었을 뿐이었지 현재는 단지 전설이 되어버린 화석화된 사상으로 여겨지고 있진 않은지 현재의 민중신학자들은 곰곰히 생각해 볼일이다.

잠시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라는 책에 있는 함석헌과 안병무의 대화를 엿들어보자.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놀랍게도 둘은 상반된 입장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관찰력이 좋고 눈치 빠른 독자였다면 분명 이 부분을 이상하게 여겼으리라.
 
안병무 : … (중략) …, 그러니까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할 때 지금 불평등하고 불의한 것이 전부 제가 있어야 할 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없이 곧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돌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해방이라는 과정없이 평화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해방이라는 과정없이 평화에로 들어간다, 불평등하고 불의한 상황을 그대로 안고 평화로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그 과정은 예수에게 꼭 있어요.

함석헌 : 날더러 말하라고 하면 거꾸로 말하겠어. 하느님의 평화에 들어가지 않고는 해방은 없다. 해방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되지도 않을 소리를 하는 거요. 해도 해방은 못가져 올거요. 다만 하느님의 평화에 들어간 사람은 그대로 해방에 들어가.

안병무 : 선생님 사고는 비역사적이거든요.

함석헌 : 글쎄 그러겠죠.

- (중략) -

안병무 : 잘못하면 제 것만 하고 제 집안만 다스리라는 말이 수수방관하라는 말도 돼요. 그러는 동안 권력자, 가진 자에 의해 평화가 교란되고 있는데요.

함석헌 : 할 수 있는 제 일도 안 하는 것이 문제지. 안 될 걸 자꾸 말하면 뭘 해.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곧 전체의 일을 한다는 거지. 제 일만 하라니까, 마치, 아무리 보수주의 신앙이기로시니 옆집 학생이 데모하다 잡혀갔는데,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거기도 한 번 들여다보지 않는단 말이냐. 그건 정치가 아니라 사람 노릇도 않는 것이거든. 예수님이 설령 아무리 정치 관계 안 했다고 해도 사람 노릇하지 말란 말은 안했거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학생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잘못했으면 했을수록 그 집을 들여다보는 것이 사람 노릇이고 종교인이지. 모른 체 한다, 이것이 바로 제 일 제대로 안 하는 것이야. 그러니 그거라도 배워 줘야지. 큰 일부터 아니고 가능한 일부터 하자는 거지. 이것이 곧 개인에 철저하면 전체에 철저한 자리이지. 이것은 장자의 주장이기도 해. 개인의 생명자리는 전체와 구별되지 않거든.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pp.108- 109, 대화 중의 밑줄은 필자의 표시)
 

여기서 필자가 보기엔 두 분 모두 해방을 말하고 있지만 함석헌과 안병무는 서로가 전혀 다른 사유의 베이스를 갖고 있다고 봐진다. 함석헌이 제시한 것은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기존의 민중신학적 사고와는 전혀 다른 해결책이었다. 여러분은 누구의 입장이 옳다고 보는가? 물론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당연히 함석헌의 입장에 더 가깝다.
 
앞서 얘기했듯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릇에 따라 각자에게 맡겨진 <달란트>라는 것이 있다. 자각인은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발견하고서 그만큼의 달란트를 남기고자 한다. 나의 모습이 언제까지나 보편적 민중, 곧 죄인에 머문다는 것은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두는 것과도 같다.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죄에 얽매인 삶이되기 마련이다. 입으로는 민중해방이니, 민중혁명이니 하면서도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평화에 속하지 않고는 민중해방이란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이뤄지는 나라인 것이다.

14. 새로운 민중신학의 효용성

지금까지 나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을 얘기했었다. 물론 이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더욱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민중신학은 계속해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밑변으로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등등과 창조적으로 접목시킬 것이다. 대안으로 제시한 새로운 민중신학의 <새로운 민중론>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인간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점에서 새로운 민중신학은 과정신학에다 사회변혁의 색조를 더욱 가미한 기독교 신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과정신학 진영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작업이며, 상당한 유용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현재 동양사상이나 물리학, 생물학, 미학 등등 여러 학문적 분야와 맞물려 연구되고 있듯이 새로운 민중신학도 종교다원주의, 생태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제3세계 해방신학과도 충분히 연관됨으로써 그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은 종국적으로 하나의 통로를 갖고 서로 교류를 할 수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여성신학>적인 전망에서 새로운 민중신학과 접목하여 신학적 작업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제3세계 신학을 통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다. 물론 아직 체계화된 언술은 못되지만, 이런 생각을 품게 된 이유는 내가 보기에 적어도 여성은 남성보다는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에 더욱 가깝다고 보는 개인적인 견해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가부장적 체제의 척결은 동시에 내적 일그러짐의 치유와 관련하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구조적 모순의 개혁마저 포함하는 일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복잡한 사회학적 분석이 요구되는 작업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여성신학은 새로운 기독교 신학으로 나아갈만큼의 급진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적어도 신학적 분야에선 그러하다고 본다. 물론 좀 더 기다려볼 일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의 이러한 시도가 얼마만큼 주목받을지는 모르겠으나 덧붙여 새로운 민중신학은 플라톤적 이원론을 밑변으로 하는 전통 보수신학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기 때문에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급진성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왜냐하면 유기체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이 그 근본 패러다임이 다르듯이 관념론적 세계관과 유기체적 세계관 또한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유기체적 세계관은 관념론적 세계관과 유물론적 세계관을 일관된 종합으로서 아우를 수 있다고 보기에 앞으로도 새로운 민중신학이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수용함으로 인하여 그 학문적 작업이 진전될수록 느끼겠지만 전통신학과 진보신학의 장점들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15.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또 하나 언급할 것은, 민중신학의 대안으로 제시한 나의 학문적 세계를 확실히 이해하는 자라면 어딘지 모르게 불교적인 냄새도 많이 느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화이트헤드의 세계관은 서구의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랑 매우 흡사한 면이 많다.
 
화이트헤드는 “불교가 종교를 태동시킨 하나의 형이상학이라는 점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는 항상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하나의 종교로 있어왔다” (RM 50/61)라고 말한다. 내게는 분명히 보이지만, 만약에 기독교가 적어도 <과정형이상학>Process metaphysics에 기반하여 그 신학적 체계를 쌓아 나간다면, 진리는 서로 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언젠가는 기독교와 불교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돼있다고 판단된다.
 
과정신학자 존 캅의 연구도 이를 잘 설명해준다고 본다(John B. Cobb, 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enc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 John B. Cobb, 김상일 옮김, 『과정신학과 불교』(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 강성도 옮김, 『종교다원주의와 오직 예수』(서울: 조명문화사, 1992) 참조. 알타이저(Thomas J.J. Altizer)는 존 캅의 사상을 통해 서구 기독교 신학이 불교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고 보고 있다(Thomas J.J. Altizer, "Spiritual Existence As God-Transcending Existence", David Ray Griffin and Thomas J.J. Altizer. ed, John Cobb's Theology in Proces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7], p.63. 참조). 특히 이 책은 존 캅의 사상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조망한 책이라서 존 캅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지침서라고 보여진다).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의 노장사상, 유교의 율곡사상과도 과정철학적 사유와 유사점이 많다. 아,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던가! 결국 기독교 신학 역시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건 특히 역사적 예수의 삶을 통해 드러난 궁극적 언명들을 합리적 언어로 조명하려는 하나의 학문적 구도이기에 불교의 사상과도 점점 유사성을 띠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내가 지금 두 종교가 하나로 통합된다는 그런 소박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기독교적 지평에서 볼 때 이전까지 타종교에 대해서 기독교는 배타적이었고 마음을 닫아왔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도(道)를 깨우치면 깨우칠수록 오히려 그 마음을 열게 될 것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서로에게 닮은꼴을 발견하게 되고 이로써 모종의 대화와 연대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붓다는 진리를 설법으로 보여줬지만 예수는 몸으로 보여줬다. 진리에 대한 <이론적 명확함>은 붓다에게 치우쳐져 있으며, <실천적 다이나믹함>은 예수에게 치우쳐져 있다. 붓다는 세계를 깨우치기 위해 그 자신의 설법을 주었고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었다(RM 55/65).

바야흐로 21세기 기독교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진정한 전환기의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학문의 지평에서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합리적 언어가 만나고, 종교의 지평에서 예수의 삶과 붓다의 깨달음이 화이트헤드의 세계관에서 하나로 만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제3밀레니움의 민중신학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임으로서 더욱 더 풍성해지기를 기원해본다.

16. 나오며

지금 이 순간 모든 이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세계 안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미세한 귀기울임이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미천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일그러짐을 끊임없이 찌르고 있는 부르심이며, 억압과 고통의 역사적 현장으로 안내하는 부르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각인의 성찰은 하나님이 이 세계에 쏘아주신 빛을 체득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로 인해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꾸라지고 엎어지며 회개하고 우리의 삶이 치유로 전환되는 때가 바로 그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문구는 여전히 민중교회에도 절실히 필요하다.
 
이제 주님의 자녀로서 거듭난 <새로운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이 세상에 내가 어디에 있든지 끊임없는 힘을 부여해주시는 든든한 분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나의 생활을 통해 다른 보편적 민중에게 또한 <계시화>된다. 자각인의 신앙은 자신이 믿고 따르려는 대상에 대한 동질화를 추구하려 하기 때문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의 행태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서남동도 언급했던 예수가 나를 통해서 재현된다고 보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근본적으로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 이 세계는 운명적으로 얽혀 있다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근원적 사실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하며, 이 세계를 하나님께 속한 몸으로서 이해하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는 그분과의 대화에서 나 자신의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신비요, 은혜요, 은총이며 진정한 종교적 경험의 차원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바로 여기서 꽃피운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이라면 이에 대한 영성은 필히 사회적 지평으로도 나타나기 마련이며, 그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내부로부터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한 이들에게 관심하는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넘쳐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리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불쌍히 여길 줄도 모르는 자는 남을 불쌍히 여길 줄도 모른다. 내가 나를 알고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제야 비로소 나의 관심사 안에도 억눌리고 소외된 자들이 함께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억눌린 자들에 대해 관심 하는 마음, 이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세계 안에서의 신의 기능이다. <투쟁>이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지금도 확신한다.
 
....................................
 
 
* 다음번에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구원론에 해당되는 몸학의 몸얼 발달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질문이나 또는 구체적인 근거에 기반한 반론이라도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물론 그 전에 먼저 논의의 효율적인 생산적 토론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쉽게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들 모음 한 번 참조해주시고 질의해주시면 더욱 좋겠구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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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77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1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4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4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598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498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31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64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3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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