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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12-12 15:07 조회(399)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b001/544 




 
앞의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그리고 (2) 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약간은 학술적인 글이지만 찬찬히 한 번 읽어보시고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8.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에 대한 직접적 파악은 불가능하다.

자 그런데 우선적 민중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누가 지금 이 시대의 최대 피해자인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란 참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여기에 이들과의 괴리가 불가피하게 놓여 있다. 우리에게는 보편적 민중 그 자체를 정확하게 분석·객관화할 능력이 없다. 더군다나 우리 자신이 이 세계에 가하는 사회학적 분석도 저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가장 합리적 지식에 속한다는 자연과학조차 절대값을 버리는 마당에 사회과학 또한 불완전한 지식이라고 밖에 볼 순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인간의 문명을 기술하는 관념의 역사라는 것은 우리의 지적 입장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현실과도 관련한다(AI 8/51-52). 우리가 <실재> reality를 발견함에 있어서 첨단의 이론인 양자물리학이나 화이트헤드 철학의 인식론이 말해주는 바는 우리의 인식체계 자체가 실재랑 맞물려 있기에 직접적으로 우리는 실재를 객관화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실재에 대해서 확보하는 것은 간접적, 혹은 확률적인 것으로서의 기술로써다.
 
다시 말해서, 우리로서는 이 세계를 일반화하려는 분석에 대한 저마다의 다양한 시각들을 빠짐없이 최대한으로 속속들이 조명하면서 그러한 이론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점들을 아우를 수 있는 최상의 정합적 <설명력>을 확보한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진다. 인간의 학문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지각양태 중 현시적 직접성의 양태인 명석 판명한 지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들을 가능한 최대한으로 감소시켜 의식상에서 명료하게 느껴보려는 <합리주의의 모험>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real preferential-minjung은 언제나 모호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우선적 민중을 직접적으로 발견하려면 보편적 민중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신이 아닌 이상 우리에겐 아직 그런 능력이 없다. 즉 우리가 아무리 보편적 민중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모든 데이터들을 총동원하여 <우선적 민중>을 발견하려 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상에서 논의되고 확보되는 민중은 엄연히 오차를 야기하는 현시적 직접성에 의한 우선적 민중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과정상에 놓여 있는 자각된 자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우선적 민중들은 필연적으로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과 오차를 야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을 객체화하는 그 자신의 입장이기에 이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라고도 볼 순 없다. 즉, 이것은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에 대한 저마다의 하나 이상의 입장인 것이다.

9. 우선적 민중에 대한 몇 가지 분석
 
그렇다면 자각인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우선적 민중이란 바로 객관적인 우선적 민중에 대한 저마다의 그림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을 자각인이 그 자신의 삶 속에서 늘 그때마다 객체화시켜 파악한 차원의 밑바닥 민중으로서 나는 이들을 일컬어 <정황적 우선적 민중>contextual preferential-minjung이라고 명명해본다. <정황적 우선적 민중>은 자각인이 그 자신의 개념적 이해가 변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자신의 삶을 투신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적의 대상에 해당할 수 있다.
 
자각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역량에 따라 <정황적 우선적 민중>을 실제적으로 도우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앞서 말했듯 실재적인 우선적 민중에 대해서는 명석판명한 의식화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정황적 우선적 민중>에 대해선 자각인의 인식 안에서 어느 정도 명석판명하게 의식되는 우선적 민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정황적 우선적 민중>에 대한 파악은 자각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정도 혹은 개념적 분석능력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 이 점은 또한 <정황적 우선적 민중>이 제각기 처해 있는 자각인의 삶의 자리와 분석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군상들의 <우선적 민중>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여기에는 학교 앞 안전시설의 미비로 인해 노출된 어린이들, 잘못된 교육체제로 인해 고통받는 청소년들, 악덕 건물주로 인해 고통받는 세입자들, 의료보험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특수질환 환자들, 자녀들에게서까지 버림받는 노인들 등등 세계 안의 억압과 고통의 경로가 다양한 만큼이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정황적 우선적 민중>에 해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황적 우선적 민중>은 이 세계의 급변하는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긴 하지만 <정황적 우선적 민중>이 놓인 현실태는 결코 <실재적 우선적 민중>이 놓인 현실태를 앞지를 수 없다. 우리는 이 점에서 <정황적 우선적 민중>이 근원적 사실로서의 <실재적 우선적 민중>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오차가 운명적인 만큼 <실재적 우선적 민중>에 대한 가장 근접된 접근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가능한 세계 안의 중생들을 객관화하기 위한 다양한 학문적 고찰의 방법들이 시도되어야만 하는 것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속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과 해석들을 가능한 한 모아-모아서 이에 대하여 종합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그 자신의 <정황적 우선적 민중>과 <실재적 우선적 민중>과의 오차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겠다. 세계 안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등 이에 대한 일반적 연구로서의 학문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다. 우선적 생명에 대하여 이러한 학문적 고찰이 필요한 이유는 고통 받는 세계에 대한 치유로서의 <실천적 효율성> 때문이다.
 
정확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바로 타자를 위한 실천적 전략에 유용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잖은가. 게다가 이러한 개념적 분석이 명료하게 수행되면 될수록 동시에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저해하며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는 적대자들 또한 명확하게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적 민중>은 언제나 이들을 억압하는 보편적 민중과 첨예하게 맞선 형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고로 종합적 판단을 위한 이론적 분석은 언제나 필요하며, 이것은 또한 언제나 현장의 실천적 지평과 긴장관계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10. 자각인의 삶이 다양한 만큼이나 우선적 생명도 천차만별

<정황적 우선적 민중>은 자각인이 삶의 목적적 느낌으로 하고 있는 <주체적 지향>subjective aim과 항상 관련한다. 자각인은 그 자신의 삶을 그 어떤 타자를 위해 희생하려 하지만, 그 출발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혹은 그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자각인에게도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는 <생활반경>이란 게 있다. 이 또한 세계 안의 억압과 고통의 다양성만큼이나 천차만별일 게다. 어차피 그러한 시공의 제약은 불가피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소수자에 속하는 자각인들의 다양한 삶의 공간만큼이나 이들이 삶을 투신하고자 하는 <우선적 생명>도 천차만별일 수 있다. 김해성 목사의 우선적 민중은 일차적으로 소외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하지, 농민이나 장애인들이 우선적으로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자각인과 우선적 민중과의 관계를 가장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예를 들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 이해를 돕기 위한 예시일 뿐이다― 혹시 예전에 MBC 방송에서 방영했던 『칭찬합시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가? 그 프로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제시한 자각인과 우선적 민중과의 관계를 금방 캐치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때 여기서 칭찬 받았던 각각의 칭찬주인공들을 <자각인>이라고 가정할 경우, 이들이 사랑을 베풀면서 맡고 있는 저마다의 사람들은 바로 우선적 민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저들은 다양한 삶의 공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 위치에서부터 나름대로의 삶의 향기를 발하며, 생의 아름다움을 형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안에는 수많은 민중들이 있는 것이다.  
 
이때 말하는 <민중>은 강자와 약자에 있어 약자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인 것이다. 가난한 자, 아이와 여성, 흑인, 멸종위기의 생명들 등등 이러한 차원들이 다양한 우선적 민중을 형성하며, 자각인은 그 자신이 깨닫는 만큼 그리고 그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저마다 돕고 있는 것뿐이다. (참고로 여기서 단순히 사회복지적인 차원만을 생각해선 안된다. 예수운동은 사회복지의 차원이 아닌 종교적 지평에서 일어나는 총체적 구원과 해방을 지향한 사건이다. 사회복지 사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말 사업 마인드로서 그리고 생활 직업으로서 혹은 명예로서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우리가 눈을 떠보면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은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부터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한 타자 전부에 해당하겠지만 자각인은 언제나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합리적이고도 반성적인 고찰을 놓칠 않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사랑만큼은 넘쳐흐른 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네 옆집에 사는 소녀가장이라든가 혹은 이웃집 할머니 등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빈곤자들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좀더 뚜렷하게 보여지는 경우에 속할 수 있겠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만나고 부딪히는 길거리나 육교 또는 기차역이나 전철 안에서 구걸하는 절대빈곤자들 혹은 노숙자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매춘녀와 더불어 인류사적으로도 뿌리 깊은 우선적 민중일 수 있다.

이렇게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는 우선적 민중들은 자각인의 손길과 맞닥뜨림으로써 그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간의 푼돈을 건네주고 하는 생활 속의 흔한 적선의 차원이 아니다. 물론 자각인의 사랑이 적선의 차원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나 그러한 건 우선적 민중에게 생존의 연명을 줄 수 있을지언정 이들의 삶을 온전하게 하진 못한다고 본다. 이들을 구제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랑>이다(연민, 동정과 다른). 물론 그 사랑은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구조하에서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정치적 투쟁으로도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겠다.

제아무리 일상적인 절대빈곤자들이 우리와 아주 가까이 접하고 있다하더라도 보편적 민중은 결코 우선적 민중을 만날 수 없다. 즉,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의 나사로가 그 자신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우선적 민중임을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깨닫기 전에는 말이다. 성경을 백 번 읽은들(성경 읽지 말라는 얘기가 아님), 주일날 교회출석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무슨 소용이랴.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도(道)를 깨치는 것, 즉 깨달음(자각)밖에 없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종교는 믿음이 아닌 <깨달음>을 요구한다.

11. 자각인의 민중을 위한 당파성(=우선성)

자각인은 바로 자신에게 맡겨진 우선적 생명을 위해 기꺼이 그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이들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선적 생명에 대한 발견은 자각인들의 인식을 통해 상호 영역에 드러나 주목받게 될 뿐이며, 우리가 우선적 민중에 대해 논의하는 모든 사항들도 가장 근원적인 실재로서의 우선적 민중에 대한 직접적인 것이 결코 아님을 알기 바란다. 전체 우주의 구도 속에서 <우선적 민중>은 존재하지만 저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선적 민중>은 우리가 인식하는 바의 굴절에 의해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의 판단 의식이 항상 그 자신이 처한 특정의 사회적 정황과 떼려야 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저마다 자각인들의 인식 지평에 존재하는 우선적 민중이 처한 상황 또는 이해관계와 관련하는 보편적 민중은 이 때의 우선적 민중과 이항대립적인 구도를 가진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데올로기 투쟁은 바로 여기서 일어나며, 이 지점에서 자각인들은 우선적 민중을 위한 <당파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자각인의 신앙은 우선적 민중의 부르짖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줄 알며, 이로써 우선적 민중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예수는 우선적 민중을 우선적으로 사랑했던 자각인이었으며, 이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믿음을 일깨워준 갈릴리 뜨내기들의 리더였다.

우리들에게는 각자의 달란트가 있다. 나의 삶의 정황과 성격을 결정짓는 나의 위치에서 각자 맡은 분량대로, 혹은 각자의 그릇대로 우선적 민중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때 자각인의 달란트는 바로 그 자신이 경험하는 우선적 민중을 위해 쓰여진다.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다. "깨달은 각자(覺者=자각인)는 짐짓 윤회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이것은 자각인이 우선적 생명들을 위해 그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자각인이 늘어날 때, 그럴 경우 자각인의 의식 지평에 나타나는 우선적 생명의 발견도 늘어나지만 이 세계에 실재적으로 고통 받는 우선적 생명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본다. 우선적 생명에 대한 발견이 꼭 일회적인 것만은 아니다. 만일 자각인이 세계를 보는 이해가 성장치 못하고 그저 안일하게 머무른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영성의 퇴행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자각인의 영성수련으로 인한 자아 발견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우선적 생명들을 발견하게 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사는 우리지만 오늘날의 인간들은 저마다 실질적인 시공의 제약을 받는 생활반경이란 게 있다. 자각인은 그 자신의 생활반경 안에서 여력이 되는 한까지 우선적 생명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동참한다.

12. 종교와 세계의 근본적 치유

이것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최상의 힘은 바로 종교의 힘이다. 화이트헤드는 종교를 인간의 내적 부분을 정화시키는 신념의 힘으로 보며, 종교의 근본적 덕목은 <참됨>sincerity, 일종의 <통찰력 있는 참됨> penetrating sincerity이라고 하였다(RM 15/29). 새롭게 변화된 개인의 품성은 당연히 그가 활동하는 범위만큼의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신선한 변화를 야기하도록 한다. 우리가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흔히 보는 문구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 또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를 알아볼 줄 아는 것도 깨닫는 만큼만 보일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점에서 종교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세계 충실>world-loyalty이라고 했다(RM 59/69).
 
합리적 종교는 세상을 이롭게 한다. 질곡의 늪에 빠져 있는 보편적 민중의 내적 일그러짐을 정화시키기 위해선 종교의 힘이 필요하다. 종교적 통찰, 곧 깨달음은 보편적 일반인에서 자각인으로 변모시키며, 그럼으로써 자각인의 내적 정화는 사회적 지평으로 이 사회의 권력의 함수관계를 타고 타인에게 침투된다. 우선적 생명들과의 참여연대, 이것이 바로 종교적 영성의 사회적 힘인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종교란 개개인이 그 자신의 <고독>solitariness과 함께 행하는 것”(RM 47/59)이라고 말한다. 자각인은 그 자신이 관심하는 우선적 생명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빛과 향기를 발하며,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구원이 획득된 상태를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의 근본악은 내가 보편적 민중(보편적 일반인)에 머무는 것, 곧 나의 ‘욕심'을 제대로 다스릴 줄 모르는 <내적 일그러짐>에서 비롯한다. 사회구조악은 나의 잘못된 욕심이 사회적으로 표출되어 나타나는 현상적 차원의 완악한 사태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완성은 종국적으로 정치, 사회 제도의 구조적 개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내적 정화 곧 나의 의지가 나의 욕심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그러한 상태에 이를 때에 완성된다고 본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불교적으로 얘기하면 가장 지고한 부처가 되는 상태라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이란 나 자신이 종국적으로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입문한 자를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써 가능하다. 그럴 경우 이것은 내가 예수의 삶을 재현하려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그렇기에 세계의 완성, 즉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바로 <모든 인간의 그리스도화>―또는 <모든 인간의 성인군자화>라고나 할까―가 될 때에야 온전한 새로운 세계의 지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민중신학이 대체로 정치ㆍ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실천을 지향한다면, 새로운 민중신학(새로운 기독교 신학)은 자신을 포함한 세계 안의 존재 일반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라는 그 자각으로 말미암아 세계 변혁의 기반을 마련한다고 볼 수 있겠다. 분명한 것은 이 세계의 근본적인 치유는 정치ㆍ사회의 구조적 개혁이라는 물적 토대의 완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설사 그런 사회가 제도적으로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범죄하고 타락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세계의 온전한 완성은 종교에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얘기한 모든 인간의 성인군자화요, 그리스도화라는 지평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진보 기독교 진영에 속하는 민중신학은 종교의 가장 핵심적 기능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존재 결단으로서의 현명한 지침이라는 인간 <고독>solitariness에 대한 치유가 부재했던 <상황신학>이었을 뿐이다. 확언컨대, 보편적 민중은 깨달음 없이는 자각인이 될 수 없으며, 자각인이 되지 않고는 결코 우선적 생명을 만날 수 없다.
 
 
(계속 이어집니다.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은 다음 4부 연재로 마감됩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질문이나 또는 구체적인 근거에 기반한 반론이라도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물론 그 전에 먼저 논의의 효율적인 생산적 토론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쉽게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들 모음 한 번 참조해주시고 질의해주시면 더욱 좋겠구요.
 
감사합니다.
 
 
 
 
 
범돌 (10-12-16 12:40)
 
연이은 세 편의 인간론... 잘 읽었습니다.
한 번 읽고 꿰뚫기에는 좀 벅차고 긴 호흡을 필요로 하지만, 정리가 되는 느낌이네요.
질문도 반론도 더 찬찬히 읽어보고 생각해 본 연후에 가능할 듯 합니다.

생명, 자각, 고독, 관계성, 연대, 오류에 대한 개방성.... 제도와 고독의 영성...
읽고 난 후, 이런 말들이 머리 속에 떠돌아 다니네요.

누군가 이것을
간결한 시로 표현해 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축된 개념의 언어들이 꽉 짜여있는 까닭에 뇌가 좀 부담을 느끼니 말입니다.

탈고를 축하드립니다.^^

    
미선이 (10-12-16 19:54)
 
그래서 저로서는 참 시(詩)가 논문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시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구요.

위의 인간론 원고는 사실 한신대 학부시절 12년 전의 글인데 이제서야 올린 것뿐입니다.
게다가 아직 마지막 연재 글 하나 더 남았습죠..^^;;

인간론 이후에는 이와 연관된 본격적인 구원론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질문이나 반론도 찬찬히 읽어보시고 언제든지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범돌 (10-12-16 22:13)
 
세상에나~
말도 안돼요!!
학부시절에 화이트헤드 이해를 기반으로 자각인과 민중의 인간론을 마무리하셨다니, 강간(?)당한 기분이네요.

저도 한때, 신학을 할까 치기어린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안 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20여년 나름대로 신학자들 글 읽으며 스스로 고민도 많이 한 결과가, 오늘 미선이님 인간론 이해하려고 낑낑대는 수준이니 말이죠.^^

참, 기도에 관한 글 참 맘에 와 닿았습니다.
다른 면을 보았죠.... (선입견이 있었거든요.)
제 경험으로는 신학적 사고를 많이 하다보면, 기도가 안되더라구요. 자꾸 생각들이 앞을 가려서 말이죠.
월터 윙크의 책을 2년 전인가 사서, 앞에 좀 읽다가 진도를 못나가고 있었는데
16장을 한 번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소개, 감사드리구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미선이 (10-12-17 11:27)
 
별말씀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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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122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123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114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115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114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139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273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223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153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225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255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185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155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146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174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261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253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127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120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189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985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145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185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22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277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215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199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221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251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285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256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244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253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270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467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340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139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189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52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18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247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209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341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519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335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00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77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1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4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4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598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498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31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64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3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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