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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12-05 04:21 조회(577)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b001/539 




 
앞의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약간은 학술적인 글이지만 찬찬히 한 번 읽어보시고
혹시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성심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5. 자각인(자각된 민중)의 구원

사실상 <자각>이라는 용어 자체는 스스로 깨닫는다는 의미가 강하지만 이 자각이라는 것은 자신을 비춰볼 만한 그 어떤 대상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개념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오류는 제2자아를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 데에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불완전함은 나 자신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완전한 비전, 즉 제2자아를 추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A에서는 A가 나올 뿐이지 어떻게 B가 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이미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비교 대상과의 설정 상태에서 나온 개념이 아닌가. 즉, 인간은 인간에게 항구적으로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 안에서는 완전한 비전을 추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이상, 영입된 이상, 지향하고 있는 이상, 성취된 이상, 사라져 버린 이상에 대한 경험이 있다. 이는 우주에 존재하는 신성에 대한 경험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경험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뒤얽힘은 본질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 밖에 있는 우주와의 관계를 경험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아닌 것과의 관련 하에서 우리 자신을 가늠한다. 유아론적인 경험에는 성공이나 실패가 있을 수 없다. 오직 그 경험만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비교를 위한 아무런 기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MT 103/145).

그렇기에 인간을 상향적으로 추동하는 제2자아의 개입이 그 첫 위상에선 외부로부터이며, 그렇기에 그 어떤 초월자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 초월자를 바로 신(神)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자각된 민중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신-인 협력의 구원>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틸리히가 말한 <신율>(神律)이라 봐도 좋겠다.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있는 보편적 민중은 그 자신만으로는 불완전하기에 그 자신의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자각한 민중>이라 하지 않고 <자각된 민중>이라고 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각된 민중의 구원은 ‘신-인 협력의 구원’이지만 현상적 차원에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력구원>으로 드러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현실 세계의 특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시작되는 어떠한 증명도 이 세계의 현실태를 초월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경험되는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난 모든 요인들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RM 69/77). 즉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신은 내재적 신이지 하나의 전적인 초월적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RM 69/78).
 
그렇기에 세계 안에 역사하는 신의 은총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며, 우리가 몸소 자각된 자로서 신앙적 체험을 하지 않는 한, 보편적 민중이 이 세계 안에서 구원의 빛을 내려주신 신의 은총을 겨우 발견하는 자리는 자각된 자들의 신앙고백, 즉 <케리그마>안에서만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세계 안에 회자될 뿐인 것이다.
 
하츠온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자각된 자의 구원을 설명해줄 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그들 자신을 통하여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하신다." 이는 우리나라의 속담에 있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는 민중의 구원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얘기하지만, 민중의 자력구원은 어디까지나 현상적 차원에서의 설명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불교에서도 제 스스로의 구원을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법력의 힘을 빌듯이 말이다. 그리고 신의 은총에 의한 자아 성찰 없이 기도나 신앙의 수련이란 있을 수 없다. 자각된 자의 영성은 그 신앙의 훈련에 따라, 이 땅의 생명이 하나하나 꽃피고 죽어갈 때마다 그에 따른 기(氣)의 작용도 포착할 수 있을 만큼의 <영민한 감각>과 슬퍼할 수 있는 통곡의 <깊은 감성>마저 지니도록 항상 힘써야 할 것이다.
 
6. <우선적 생명>preferential life으로서의 <민중>minjung
 
그런데 일단 자각된 자는 깨달음만 갖고 있을 뿐이지 그 깨달음을 드러낼 열매가 없다. 구원의 씨앗을 겨우 발아시켰을 뿐인 것이다. 깨달음에 의한 새로운 목적적 충동은 당연히 자신의 고위적 욕구를 실현할 대상인 이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가지도록 이끈다. 즉, 자각된 자는 그 자신의 내적 일그러짐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세계 안의 사회적 지평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데, 이로써 자각인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자각인은 바로 이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려 한다. 이들의 아픔을 곧 나의 아픔으로, 이들의 고통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생각하는 영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들을 <우선적 생명>preferential life이라고 부른다. 불교 개념인 <중생>이란 표현을 곁들인다면, 이들은 <우선적으로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고 봐도 좋다. 예전에는 단지 이 부분을 <우선적 민중>이라고만 썼었는데 내가 <민중>minjung을 <생명>life으로 다시 표기한 이유는 다름 아닌 우선적 생명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생명체까지도 모두 포함시키기 위해서이다. 단지 그 이유에서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선적 생명을 인간에 적용시킬 경우 이들은 곧 우선적으로 구제받아야 할 인간, 곧 <민중>이 될 것이다. 이들은 세계 안에서 최대한의 고난과 고통에 빠져 있는 자들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선적 민중>이란 역사적 과정상에 있어서 그때그때마다 항상 이 사회의 밑바닥에 자리하는 ‘보편적 민중'을 말한다. 또는 ‘보편적 민중' 가운데서 가장 최대치의 고난을 담지한 사람들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계층적 의미가 강하지만, 꼭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만 따질 수 없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등 신체적 장애까지 포함하여 통합적으로 어우러진 총체적 빈사상태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우선적 민중은 역사적 과정에 있어 항상 바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가 진행하고 흐를 때마다.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다른 양태를 띤다고 하겠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실재한다고 보지만 고정된 실체는 아닌 것이다. 이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불합리한 처지에 놓여있는 유기적 실체일 따름이다.

우선적 민중은 이 세계 안의 고난과 고통 즉 부조리한 모순들을 가장 많이 경험한다. 그렇기에 이들은 보편적 민중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억압과 모순의 문제가 해결되는 평등의 그 날까지 항구적으로 현존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보편적 민중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선적 민중도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편적 민중의 죄로 인해 필연적으로 파생한 자들이며, 기존의 민중신학이 말하는 한(限)의 최대 담지자들이다.
 
보편적 민중의 <죄>는 언제나 이 우선적 민중의 <한>(恨, Han)과 불가분적으로 얽혀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한>이 있다. 즉, 이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죄에 의해 피해를 받은―혹은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가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점은 앤드류 송 박(Andrew Song Park) 역시 언급한 바 있었는데, 그는 말하길 현대신학의 죄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빠뜨렸다고 보면서 한의 문제를 취급함이 없는 죄에 대한 교리는 단지 가해자 중심에만 맞추는 것이기에 한의 문제를 제대로 들춰내야 죄의 문제가 올바로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세기 민중신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를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학사에 있어서 한의 발견이요, 고통 받는 우선적 민중의 발견에 다름 아니다.

7. <우선적 생명>은 <자각인>의 우선적인 실천 대상이다.

이제 <우선적 생명>이라는 표현에 있어 왜 <우선적>인가를 먼저 짚고 넘어가자.
 
우선적 생명은 왜 하필 <우선적>인가? 나 자신이 왜 하필이면 <우선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불합리한 모순에 대해 대칭적인 자세, 곧 우선적인 생명들을 더욱 우선시하는 자세로 맞불을 질러서 종국적으로 평형을 유지시켜야 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왜 하필이면 화려한 궁궐보다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났으며,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정상인보다 병자를, 남성보다 여성을, 요즘 세대의 용어로 얘기해서 일반인보다 <왕따>를 왜 더욱 가까이 하셨단 말인가? 왜? 왜? 왜? 그것은 이 세계가 뿌리깊게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관조함에 있어서 이 땅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일수록 그 상처의 아픔이 더 크다고 봤기 때문이리라. 즉 세계 전체가 병들었다고 보더라도 그에게는 가장 급한 곳을 우선적으로 치유해야함이 필요했으며, 이것이야말로 세계 전체를 치유함에 있어서 가장 힘 있고도 효율적인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예루살렘 상류층보다 갈릴리의 <오클로스>를 더욱 가까이함으로서 자신의 보편애를 역사적으로 드러내셨다. 엄밀한 의미에서 1세대 민중신학자들이 발견한 것도 바로 고난의 담지자로 봤던 <우선적 민중>의 발견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선적 민중을 우선시하는 자세로 인해 흔히 말하는 '민중을 섬긴다'는 얘기나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표현도 바로 역사적 진행과정에서의 불합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자각된 자의 캐치프레이즈인 것이다. 우선적 민중에게서 나타나는 불합리한 모순들이 우선적 단계로 해결될 때 이 땅은 저 평등의 하나님나라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선적 생명에 대한 치유는 동시에 우선적 생명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우선적인 저항과 같은 맥락으로 드러난다. 이데올로기적 투쟁도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 물론 우선적 민중 역시 보편적 민중이 가지는 ‘내적 일그러짐’도 함께 가진다. 하지만 이는 보편적 민중의 더 큰 권력과 횡포에 의해 과장된 부분이 많다. 안병무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에서 그 <어린 양>을 ‘민중’으로 봤던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우선적 민중에 대한 온전한 치유 행위는 이들이 질곡의 고통에 빠져서 짐을 지게 된 부분을 밝히는 행위와도 같이 맞물릴 수밖에 없다. 자각인은 우선적 민중의 삶을 그 자신의 관심사 안에 포함하고 있기에 그들이 처해있는 불합리한 여건의 개선에도 개입하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자신의 실존과 타자의 영향력에 의해 항상 통전되면서 형성되는데, 그 왜곡의 정도는 권력구조의 불합리함으로 인해 우선적 민중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우선적 민중은 이 세계 안에서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또한 역으로 자각인은 그 같은 우선적 민중의 한(恨)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되는 셈이다. 자각인의 사역은 결국 우선적 민중이 자각인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구원의 열매란 바로 자각인과 우선적 생명과 만나서 엮어내는 신앙의 성과물을 말한다. 그렇기에 구원은 사건 속에서 형성론적이다. 전통 보수신학은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랑 가장 닮은 자로 보는데 반해, 기존의 민중신학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를 예수로 보았다(물론 공식화할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아주 근접된 의미로서, 1세대는 <우선적 민중>을, 운동의 신학 또는 변혁자 주체론을 말하는 2세대와 3세대는<자각인>을 각각 <민중>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 곧 새로운 기독교 신학은, 강도 만난 자는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자각인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우선적 생명)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되어야 할 예수>(=자각인)라고 보며, 이 양자가 만나서 예수사건, 민중사건, 구원사건, 치유사건이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로 계속 이어집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질문이나 또는 구체적인 근거에 기반한 반론이라도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물론 그 전에 먼저 논의의 효율적인 생산적 토론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쉽게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들 모음 한 번 참조해주시고 질의해주시면 더욱 좋겠구요.
 
감사합니다.
 
 
 
 
범돌 (10-12-08 18:09)
 
2편의 인간론을 대략 읽어보았습니다.
민중을 보편적 인간의 관점에서 통전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 구체적인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는 그것이 참 좋았구요.

참, 계속 이어질 내용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인간론 안에서 구원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규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약성경 특히 바울의 편지들은 매우 종말론적이어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구원의 궁극적 의미를 오직 내세에 두고 있잖아요.
예수천당 불신지옥. 끝이죠.
그 관점에서는, 삶의 자리와 관계성에 기반한 인간론이 무용지물입니다.

미선이님은 바울과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저는 실제로 그들이 매우 내세적인 구원을 꿈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세계관이 그랬기에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보는데...

이걸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인간론 자체가 다르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네요.

좀, 횡설수설했는데
어쨌든 인간론 후속편에 그런 부분들을 담아내실 거죠?

    
미선이 (10-12-10 01:44)
 
범돌님 반갑습니다.

인간론과 구원론은 연관되지만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자면
구원론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따로 언급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구원의 개념을 몸삶의 건강한 증진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기에
기존 기독교의 구원론과도 많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구요.

당연히 바울의 관점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예수사건 이해에는 당시의 헬라문화권의 관점이 알게모르게 스며들어 있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 '새 술을 새 부대로'서 마련한 건 아니라고 보는 거죠.
현세와 내세를 가르는 개념도 결국 이원론적 관점이 갖는 폐단에서 나온 거구요.

오로지 저는 지금여기서부터의 구원 개념입니다.
언제나 지금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구원 개념입니다.
모든 존재들은 항상 지금여기에 놓여 있으니까요.
제가 볼 때 이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현실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봅니다.

구원론에 대한 디테일한 이해는 아마도
저의 <몸학>에서 따로 얘기가 되어지지 않을까 생각되네여..
저는 구원과 건강도 몸얼의 발달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이에 대해선 약간 게시판에 언급한 적도 있긴 합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425

그리고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보는 사후세계에 대한 모색도 따로 쓴 글이 있구요.
http://freeview.org/bbs/tb.php/b001/384

참고가 되셨기를 바라겠습니다.

범돌 (10-12-13 12:28)
 
답변 감사드립니다...
인간론 안에 말씀하시는 지금, 여기의 구원론적 전제가 이미 깔려 있기는 하죠.

다만, 지금 여기의 구원론이
신약성경의 표현방식인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과 연계되어 집중적으로 해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약성경의 종말론적 표상을,
지금 여기의 삶의 <궁극적 의미의 지평>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몸학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미선이 (10-12-13 16:10)
 
제 입장에선 오히려 궁극적이라기보다는
<극단적 의미의 지평>이라고 표현한다면 저역시 동감하는 바입니다.
성서의 묵시 문학의 출현이 그러하듯이 종말론적 구원의 표상은
한편으로는 매우 극한 상황에서의 신앙적 표출이라고 보는 거죠.
이를 테면ㅡ 오늘날에도 죽기 직전의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나
불치병 환자들에게는 어쩌면 이러한 신앙이 유효하게 필요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고맙습니다.

        
범돌 (10-12-14 19:34)
 
종말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이미 간단하게 정리해서 퉁 쳐버리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야말로 종말론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기독교를 믿는 의미를 두고 있더라는 점 때문입니다.
시한부 인생도 아니고, 불치병 환자도 아닌 사람들까지도...

<인간> 얘기하고 있는 자리에, 쓸데없이 칙칙한 종말 얘기를 개입시킨 점, 이해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미선이 (10-12-15 10:55)
 
간단하게 퉁ㅎㅎ

물론 종말론이 인간의 한측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저도 의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독교 신학에선 내세 염원의 종말론을 주장할 순 없다고 여겨집니다.
적어도 문자적 의미로서의 내세 염원 종말론은 거부될 듯 싶은데, 요한계시록에서도 보여지는
공포와 위엄에 굴복되어 보상과 처벌의 내세 심판론을 말그대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많을 거 같아요.

인간도 다같은 인간은 아닐터입니다. 그러한 보상과 처벌에
민감한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잖아요.
몸얼의 발달 단계에 따라 자아가 관심하는 범주도 달라집니다.

힘의 전능성에 굴복하고 이를 숭배하는 차원에서 보면
어차피 기존의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크게 다르진 않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도 없잖아요. 그건 또다른 문제니까요.

궁금하신 건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범돌 (10-12-15 20:32)
 
약간의 혼선이 있는 듯 싶네요.^^
저는 소위 말하는 실체화된 내세라는 걸 거부한지 오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저 내세염원의 종말론을 붙잡고 씨름하곤 하죠.
나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단지, 그 문자 이면에서 소통이 되기를 바라는 맘 때문에.

결국, 돌아오는 것은 경계와 적개심이란 걸, 충분히 겪었지만...

참, 미국생활 할 만 하신가요?

    
미선이 (10-12-16 19:41)
 
네에.. 아마도 범돌님 역시 그러한 실체화된 내세 개념은 안받아들이실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의미 해석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애초에 말씀하신 신약성서 및 바울서신에 기록된 종말론이
실체화된 내세 종말론과 전혀 무관한 거라고는 보기 힘들기에
적어도 사실로서의 내세 염원의 종말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이를 사실로서 믿는 사람들에겐 분명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의미 해석을 좋게 얘기해주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실 여부의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할 수 있는 위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직 여전히 기존 기독교 사람들 대부분은
의미 해석보다는 사실 자체의 여부에 더 먼저 관심하는 지경이니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복음주의와 진보 진영에도 만연한 성서우회주의자들] 참조.
http://freeview.org/bbs/tb.php/b001/354

잘아실테지만 성서 문자주의자들이라는 것은
우선은 성서 구절의 사실 여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범돌님께서도 경계와 적개심을 충분히 겪으셨다니
이에 대해선 이미 많은 고민들을 하고 계실꺼라고 봅니다.

미국생활은 할 만하다기보다 아직은 할만하게끔 적응하고자 노력중이랍니다..^^;;
현재 맡겨진 일과 마감 일정이 있어서 다소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없는 점이 있긴 해도
어쨌든 차근히 하나씩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그럼 또 계속 얘기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범돌 (10-12-16 22:17)
 
미국생활 시작하느라 바쁘실 터이니, 정말 끝입니다.^^

            
미선이 (10-12-17 11:28)
 
아직 본격적인 시작은 아니에여.. 언제든 또 얘기나누셨으면 해요. 님두 건강하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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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120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107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123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122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123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114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115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114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139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273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223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153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225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255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185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155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146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174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261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253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127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120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189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985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145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185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22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277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215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199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221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251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285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256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244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253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270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467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340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139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189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52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18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247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209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341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519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335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00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78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1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4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4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598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498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31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64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3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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