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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11-30 05:49 조회(574)
   트랙백 주소 : http://www.freeview.org/bbs/tb.php/b001/537 




(* 기독교 조직신학에서도 <인간론>은 매우 중요한 사항에 속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아래의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만, 조금 약간은 
  부분적으로 살을 덧붙여 수정 보완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에 해당됩니다..)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목사나 사제가 '영혼'에만 천착할 때, 결코 '인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 영혼은 땅 위에 기대고 설 다리가 없는 유령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인간의 일용할 양식과 신체적인 건강,
 몸의 고통, 노동과 오락 등의 문제를 완전히 외면해 버린다면
 그 복음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 C. A. 반 퍼슨(C. A. van Peursen)
 
 
 
1. 들어가며
 
나 자신이 새로운 기독교로 전환하게끔 만들어줬던 것은 사실상 민중신학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의 민중신학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민중신학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가운데 <새로운 민중신학>a New Minjung-Theology을 전개한 바 있다. 그 결실이 바로 나의 첫 작품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 2004)이다.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이 갖게 된 문제 의식은 단순히 민중신학 진영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결국엔 이천 년 기독교 신학 전반의 문제로 와닿았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다시 신학하기>Re-Theology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은 기존의 기독교 신학을 대체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이기도 하다. 나는 기독교 신학 자체가 사회변혁적 측면마저 담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 고독에 대한 영성적 성찰에 대해서도 함께 담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었다.
 
이에 대한 연구로서 마련된 것이 바로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피력된 인간론과 영성론이다.
내가 말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은 어차리 내가 보는 민중론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을 접해보지 않는 분들을 있기에 이 글 역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바이다.
 
기존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불신자>와 <신자>로 나눈다.
반면에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는 크게 <보편적 일반인><자각인>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 일반인>이란 흔히 볼 수 있는 <세속적 일반인>을 의미한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보편적 일반인들 가운데 가장 큰 고통에 빠져있다고 보는 <우선적 민중>(혹은 민중)이 있다.
그런데 이 우선적 민중은 필히 <자각인>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차원에 해당된다.
새로운 기독교 신학이 펼치고 있는 <인간론>은 바로 이에 대한 글인 것이다.
 
나는 기존의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에는 큰 오류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사실상 기존 민중신학에서도 <민중론>이 가장 중요한 핵심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직까지도
명확한 구도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기에 나로서는 새로운 민중론을 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나 자신이 이제부터 제시하는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결국 화이트헤드 철학이 밑변에 깔려있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과정신학에서조차 명시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는 ―특히 <우선적 민중> 개념에 있어서는― 새로운 창조적 논의에 속한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여기에는 새로운 개념으로 인한 신조어 또한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존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적인 대안적 모색에 불과하기에 나 역시 민중론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임을 기본적으로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차피 모든 담론이 모호성의 소산에 따른 판단과 분석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최상의 설명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불가피한 것 아니겠는가.

논의에 앞서 한 가지 미리 일러둘 것이 있다. 본인이 여기서 제시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인간>이라는 용어와 바꿔서 쓰더라도 무방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단지 <인간>이란 용어보다 <민중>이란 용어가 세계 안의 고난과 고통에 처해 있는 인간 실존의 상황을 더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져서 <민중>이라는 용어를 쓴 것뿐이다. 현재 나 자신은 화이트헤드를 통한 새로운 사회학 구상에 있어서는 본장에서 언급된 <보편적 민중>, <자각된 민중>, <우선적 민중>을 각각 <일반인>, <자각인>, <민중>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임을 참고로 해두기 바란다.
 
단지 나 자신이 보는 <민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우선성>preference을 가진다는 점에 그 커다란 특징이 있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민중이 신으로부터 ‘우선적 특혜로서의 우선권’을 가진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기존의 제3세계 신학에서 곧잘 말하는 <당파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민중의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고자 본장에서는 기존의 민중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 <우선적 민중>으로 명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같은 논의들은 기존의 과정신학과도 다른 색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보다 창조적이고도 새로운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회학적 인간론을 마련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알다시피 서구의 과정신학에서는 <민중>Minjung이란 개념자체가 부재하다.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한국의 민중신학적 색조에서 연유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이 기존의 현장에서 ―그것이 기독교 교회이든 사회의 어느 곳이든 어디든 간에― 어떻게 적용 가능할 수 있는지를 유념해서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자세한 논의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우리는 모두 <보편적 민중>universal-minjung이다.

나는 민중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것은 사회학적 이해보다 존재론적 이해가 먼저 전제되어야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학적 언명들은 형이상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 그 타당성을 제대로 가질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한 추론은 불완전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AI 197-8/252). 모든 학문의 밑변에 철학이 근저하고 있듯이 이것은 곧 민중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민중을 조심스럽게 정의해본다면 나는 민중을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는 존재 일반>이라고 본다.
 
화이트헤드가 보는 이 세계는 연기적으로 짜여있으며, 이러한 세계 안에서 어느 누구도 분열과 부조화에 대해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는 누구나 다 민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심지어 하나님도, 예수님도 일단은 분열과 부조화에 있어선 아직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고 봐야한다. 분열과 부조화는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불완전한 모습이요 악의 양태를 말한다. 이 세계 안에 악이 창궐하고 인간의 본성이 불완전한 한 모든 인간은 <내적 일그러짐>을 가진 죄인일 수밖에 없다.
 
<내적 일그러짐>은 그 자신의 <주체 영역>의 일그러짐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상호 영역>에서 <타자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 드러남으로서 타자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한 인간은 나의 내적인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못하기에 언제나 <저급한 충동>이 그 자신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못된다. 이 세계와 나는 이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세계가 오염되면 나 자신도 그 오염과 결코 무관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과 책임성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우리가 이를 실행하지 않는 한 여전히 이 세계는 불완전할 것이므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는 항구적으로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바로 이러한 <민중성>을 가진다.
 
나는 이러한 죄에 빠진 만인을 <보편적 민중>universal-minjung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새로운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곧 <인간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다 기본적으로는 보편적 민중에 속한다. 모든 인류는 기본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필요한 보편적 민중이다. 보편적 민중은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기 때문에 구제를 받아야 할 존재인 <중생>衆生이라는 용어와도 어느 정도 상통한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보편적 민중은 중생을 인간이라는 존재에 소급해서 본 차원일 수 있다. 보편적 민중은 <내적 일그러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내적 일그러짐을 제어할 수 있는 종교적 성찰이 절실히 요구된다. 만약 이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존재 일반에 대한 각고한 성찰이 없다고 한다면 이들은 결코 의로워질 수도 없고 거듭남을 맛볼 수도 없으리라.
 
보편적 민중은 <욕망 중의 욕망>이라고 볼 수 있는 이성에 대한 개발이 게으르거나 더 이상 성장치 못하고 고착화되어있으며, 그렇기에 그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치리(治理)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세계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변이성에 대한 고찰은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에게서 곧잘 발견되는 것은 오로지 저급한 차원의 욕구 충족들이다. 이로 인해 보편적 민중의 <내적 일그러짐>은 사회적 지평에서 인간의 권력과 함수관계를 가지면서 남을 해할 수 있는 횡포, 수탈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때의 권력이란 이 세계에 대한 영향력 정도를 말하며, 이것은 그가 속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그 영향력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같은 정도의 <내적 일그러짐>이라도 권력을 많이 가진 자일수록 이 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더 기여할 여지가 많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판검사가 한 번 거짓말하는 것과 평범한 소시민이 한 번 거짓말하는 것은 그 영향력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파생시킨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3. <자각인>은 합리성에 따른 자각된 열망을 가진다.
 
이러한 ‘보편적 민중'가운데서 <내적 일그러짐>을 제어할 수 있는 <기제>를 체득하여 자기 개발의 상향적인 과정상에 있는 자를 <자각인> 혹은 <자각된 민중>이라 한다. 그 <기제>란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만성적이고 고질화되어 있는 인간의 맹목적인 충동들을 효과적으로 매우 잘 다스릴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방법상의 장치를 말한다. 세계 안의 고등 종교들은 바로 이러한 기제들을 그 궁극상에서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의 하나님나라>이다.
 
그것은 삶의 질을 가장 근원적으로 고양시키는데 있어서 궁극적인 질서에 맞춰져 있으며, 세계 안에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부조리함과 난제들을 그러한 문제들이 해소된 이상적 질서와 대비시킴으로써 그 간격을 좁혀나가게끔 하는 새로운 실존인 것이다. 그것은 주체자 자신의 결단을 신이 개념적으로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는 가능태들에 대해 적절한 선택을 유도하도록 돕는 기능으로서의 내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각인은 보편적 민중과 달리 저급한 차원이 아닌 고위적 욕구를 추구하는 <자각된 열망>으로써 그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각된 열망은 궁극적으로는 신의 원초적 본성에서의 개념적 가치평가를 끊임없이 지향하도록 맞춰져있다고 볼 수 있으며, 세계 안에서는 이를 부단히 물리적으로 충족시키고자 그 자신을 추동하는 창조적 에너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민중과 자각된 민중은 바로 여기서 구분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오영환 교수의 언급에서도 보듯, 화이트헤드가 인류의 문명사를 <맹목적인 충동>과 <자각된 열망>과의 상호 대립·협력의 역사로 봤다면 이것은 나의 진술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얘기라 할 수 있겠다(AI역 26). 인류의 진보란 바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내적 일그러짐>을 제어한다는 것은 자각된 민중이 그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거나 거세시키는 <금욕>의 차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대개 일반적인 종교인들 가운데 보수적인 성향의 종교인일수록 이러한 행태를 지향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집착이나 욕구 자체를 버리는 차원이 아니라 나의 집착이나 욕구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심원한 깨달음을 이루고서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들이 곧 <자각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각인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참된 가치를 식별코자 하는 <열려있는 눈>과 이를 맹렬히 실현코자 하는 <뜨거운 가슴>이 있다.  <자각된 열망>이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한다.
 
자각인은 <자각된 열망>으로써 그 자신의 삶을 형성해나가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각인은 그 생활 속에서 자각된 열망이 가져다주는 거부하기 힘든 매혹적 느낌 때문에 그 자신의 부단한 상황을 극복코자 내적으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지만, 이러한 내적인 고민과 갈등도 결국에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적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시련과 연단으로서의 소중한 의미로서 이어지게 된다. 자각인의 이 같은 시련들은 그 자신이 세계 안에서 <홀로>를 경험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극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자각인의 <창조적 전진>이란 바로 이 싸움의 결과물이며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승리>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자각인은 세계 안의 <진보>의 전선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그렇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것도 결국은 보편적 민중인 <나>가 자각인으로 거듭남으로서 일어나는 사태에 해당한다. 보편적 민중은 내적 성찰, 즉 깨달음(자각)이 있어야 자각된 열망에 휩싸일 수 있으며 세계 안에서 의로운 삶을 향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구원의 완결이 아니다. 자각인의 내적 성찰은 <찰나>에 일어나지만 그의 삶에 비로소 열매를 맺어야만 객체적 불멸성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4. 보편적 일반인과 자각인 그리고 퇴행현상
 
보편적 민중에서 자각된 민중으로 돌입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자각의 순간, 그것은 바로 <이전의 나>와 앞으로의 <새로운 나>가 나의 개념적 느낌에서 콘트라스트를 일으키게 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삶은 둥근 악순환의 고리를 빠져 나오기 위한 삶이어야 한다. 그러한 순환이 똑같은 반복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러한 순환의 고리를 빠져나오는, 미세하지만 소리없이 찾아오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기는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궁극적인 사물의 원리에서 본다면 이것은 신의 원초적 본성에서 최상으로 평가된 가능태가 현실적 계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주체적 형식에 침투하여 포착되는 순간에 상응하는 의미다. 이 찰나의 순간 이전이 바로 보편적 민중이고 그 순간 이후가 바로 자각된 민중의 삶이다. 보편적 민중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치이지만, 자각된 민중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신을 넘어선 타인을 위한 가치이며 타인을 위한 가치를 곧 자신을 위한 가치로 전환할 줄 아는 이들이다.
 
보편적 민중의 중심에는 '불완전성으로서의 나'(유아기적 에고, 단순 욕구의 추구)라는 자아가 들어서지만 자각된 민중에게는 '완전성으로서의 나'(그리스도적 에고, 고상한 욕구의 추구)가 깃들어 있다. 보편적 민중이 자각된 민중으로 들어서는 순간은 찰나이며, 이는 보편적 민중이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힘을 받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자각된 민중의 <인간성>은 <영성>으로 탈바꿈한다.
 
자각인들은 <신의 뜻>에 대한 직접적 교통을 지향한다. 자각된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은 언제나 나와 감응하는 그 곳에 계신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일반인들의 <맹목적 충동>을 유익한 삶으로서의 <자각>으로 이어주는 그 임무가 가장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첫 깨달음의 순간 이후부터 자각인에게는 종착역인 <그리스도>로 향하기 위한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고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자각인이라고 해서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거나 마냥 의로운 삶을 살거나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는 첫깨달음인 자각의 그 순간 이후부터는 <영성의 수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따라서 굳이 불교적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나의 새로운 기독교 신학은 <돈오돈수>보다는 오히려 <돈오점수>를 지향한다고 봐도 좋겠다. 깨달음 이후에는 끊임없는 수행 정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그 세 가지 시험이 주는 의미들을 잘 알고 있다. (생존을 포함한)돈, 명예, 권력 등등 그것들은 바로 이 세계 안의 자각된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시험 사례에 해당한다. 그것은 자각인에게도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는 시험이며, 자각인이 죽을때까지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대표적인 시험들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40일 광야의 시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포함한)돈, 명예, 권력 등등 이런 것들이 결국은 자각인의 눈을 가리게 만들고 깨우침의 첫 순간이라고 볼 수 있는 날카롭던 첫 키스의 추억과 아득히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각인에게 찾아오는 <퇴행현상>이며, 곧 영성의 쇠락이기도 하다. 바로 그렇기에 자각된 자의 영성이란 매순간순간을 갈고 닦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죄로 이어지기 십상이란 점을 자각인이라면 필히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 사람이 자각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단지 그 삶의 열매로써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칫 보편적 민중에 해당하는 일반인들의 위선적 행위와도 헷갈릴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 이유인즉슨 타자의 정체와 흔적은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상호 영역>에서만 확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자신의 생활 주변과 그가 속한 사회에 분열과 다툼과 거짓의 해를 끼치고 조장하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는 없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자각인으로 들어서는 그 깨달음의 순간은 충분히 생의 마지막에도 꽃필 수 있다. 이를 테면 죄 많은 사형수가 뒤늦게 뉘우치고 후회하며 흘리는 눈물 앞에서 숙연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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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145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185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22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277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215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199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221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251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285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256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244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253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270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467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340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139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189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52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18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247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209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341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519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335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00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78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1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5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4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598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498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31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64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3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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